독립유공자 인정받은 김지태 선생 아들 김영재씨
“어머니, 이제야 아버지를 되찾았습니다” “어머니,이제야 아버지를 되찾았습니다. 좀 더 오래 사셨더라면 아버지 되찾는 것을 보셨을 텐데...” 인터뷰 내내 눈물만 흘렸다. “자식된 도리로 아버님의 염원을 이뤄 이제 한이 없습니다.” ‘집안의 금기’인 아버지 김지태 선생(金誌泰. 1911~1937)이 독립유공자로 밝혀져 지난 3.1절에 건국훈장을 받은 날 맨 먼저 4년전 돌아가신 어머니(안보순·1913~2001)가 떠 올라 아픔과 설움은 한순간에 눈물이 돼 흘러 내렸다. 우리 정부가 지난 3일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지태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영재(70)씨는 최근 인서리에서 덕례리로 이사한 자신의 자택에서 기자와 만나 파란만장했던 부친의 생애와 자신의 인생 역정을 털어놓았다. 애국지사 김지태 선생 1911년 7월27일 광양읍 인서리 271번지에서 출생한 김지태 선생은 한학자 였던 김학근 옹의 둘째 아들로 일찍이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당시 집안 분위기가 그랬다. 굳이 누구라고 지칭을 안해도 김지태 선생의 백부가 남조선노동당위원장을 지낸 이력 등은 지역민에게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김지태 선생은 20세 때인 1931년 12월 광양에서 노동계를 만들어 노동자에게 항일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했다. 1930년대는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 등 민족말살정책에 포섭돼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과 변절의 길을 거듭했지만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지조를 지켜나가는 모습이었다. 이때 김지태 선생은 변절하지 않고 23세 때인 1933년 5월1일 혁명가 등을 고창하며 김기문 등과 함께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동지규합 등의 활동을 하다가 같은해 9월 일본 경찰에의해 체포돼 1년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를 광양독서회사건이라고 하는데 당시 광양청년 100여명이 체포되었다.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소화 9년 제54호)의 판결문은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자료다. 당시 10명이 실형을 받았는데 박영진(37세). 박경래(23세). 김지태(25세). 정학규(24세). 박기동(22세). 박준오(28세). 박봉두(21세). 김갑곤(29세). 김희곤(21세). 김주근(32)이 그들이다. 이중 김갑곤 선생의 친동생인 김희곤 선생은 전남경찰국 특별고등과 진 순사부장의 혹독한 고문으로 모진 고생을 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가 해방 2년 전인 1943년 8월30일이었다. 김갑곤·희곤 형제는 오는 15일 광복 60주년을 맞아 정부로부터 김지태 선생 다음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인정 받아 나란히 건국포장을 추서 받는다. 아들 김영재 교사의 인생역정 사람들은 그를 빨갱이 자식이라고 비아냥 댔다. 아버지 김지태 선생은 일제 순사들에 의해 그의 나이 2살 때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으니 졸지에 편모슬하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안보순·1913~2001)는 그런 시대적 아픔을 삭이며 자식들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다가 지난 2001년 2월16일 향년 8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어머니는 소년 김영재에게 종종 아버지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훌륭한 분이시다. 그렇게만 알면 된다고만 하셨어요.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해방후에는 공산주의자의 아들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두려웠나 봅니다” 라고 그 뜻을 헤아린다. 그는 광양중학교를 졸업후 순천고교를 다니는 3년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문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는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연좌제라는 망령이 늘 그를 괴롭혔다. 60년대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했지만 부친의 사회주의 전력 때문에 발령이 되지 않았다. 중등교사에도 응시했지만 이 또한 허사였다. 당시 정보과 한 형사는 “당신은 아무리 취직을 하려고 해도 신원 때문에 힘들 것”이라며 비아냥대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60년대 초 주위의 뜻있는 친구들과 함께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관내 학생들을 모아 검정고시에 응시케 하기 위해 공부를 가르쳤다. 장소는 유당공원이었다. 당시 유당공원에는 벽돌로 지어진 미군 막사가 남아 있어 그곳을 이용했다. 그는 이후 초등학교 교사 부족 현상이 일자 또다시 그곳에 응시했다. 문제는 신원보증이었다. 그러자 그는 서울로 향했다. 광양출신 이경호 법무부 차관을 만나 신원보증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경호 법무부 차관(이승재 해양경찰청장 백부)은 자신을 찾아 온 김영재 예비교사에게 “너의 아버지를 잘 안다. 고생많이 하는구나”하며 흔쾌히 신원보증을 해줘 그길로 교사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하지만 그는 어렵게 교사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순탄치가 않았다. 80년대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헌법상으로는 연좌제가 폐지됐지만 정보과 형사들에게 끝없는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광양농고 교사시절 그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학생들이 방과 후 싸움이 일어났는데 당시 정보과장은 느닷없이 김영재 교사를 정보과로 연행해 갔다. 그러고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다 퇴근하고 텅빈 정보과에 몇 시간을 잡아 놓더니 왜, 날 데려왔느냐고 묻자 “당신이 학생들을 선동해 교란을 목적으로 싸움이 일어 났다”며 뭔가 음모가 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퇴근하고 동료 교사들과 대포집에서 막걸리를 마실 때도 미행이 뒤따랐다. 김영재 교사가 가는 사람 모이는 곳이면 낮모르는 사람이 옆좌석에 버텨 앉아 얘기를 엿들었다는 술회다. 당시 동료들은 처음에는 그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불편함도 없진 않았지만 교사들이라 이해를 해 준 것이 큰 힘이 됐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2000년 다압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34년간의 파란만장 했지만 정든 교육자의 길을 정년퇴임 했다. 아버지를 애국지사로 만든 장본인 김영재(70). 그는 어느새 자신도 칠순의 할아버지가 됐다. 광복 60년이 돼서야 자신의 아버지가 국가로부터 애국지사로 추서됐지만 아버지 김지태 선생을 명예회복 시킨 것은 근 30여년에 걸친 그의 끈질긴 노력에 의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틈나는 대로 국가보훈처 문을 두드렸다. 자신의 아버지가 애국지사임을 항변했지만 그때마다 자료가 빈약하다는 벽에 부딪쳤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면 구술로 전해 듣고 정리를 해 국가보훈처로 보냈다. 하지만 독립유공자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를 간파한 그는 30대 교사 재직때부터 방학을 이용 아버지의 당시 재판기록 찾기에 나섰다. 아버지가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재판기록이 있어야 명예훼복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아버지의 재판기록을 찾기위해 전국을 백방으로 다녔습니다. 근 수십년이된 자료를 이제야 찾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판기록을 찾기위해 맨 먼저 향한 곳이 광주에 있는 농장형무소(동명동, 현 광주교도소 전신)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자료가 없다며 진주형무소로 가 보라는 말만 들은 채 발길을 돌야야만 했다. 진주형무소 또한 6.25 전쟁으로 자료들이 대구로 옮겨 갔다는 말을 전해 듣고 대구로 향했지만 그곳 또한 부산에 있는 지하 문서고에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돌아와야 했다. 그는 이처럼 아버지 재판 기록을 찾는데 틈틈이 짬나는 방학기간을 이용했기 때문에 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부산의 한 지하 문서고에서 재판 기록을 찾았다. 당시 문서고 직원에게 부탁을 한 결과 그 직원이 시간 나는 틈틈히 지하에 내려가 김지태 선생의 재판기록을 찾아준 것이다. 그 직원은 3년만에 이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찾아 낸 아버지의 재판기록도 30여년이 흐르는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재판기록만 있으면 모든 게 될 것 같았지만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로 이어지는 동안 아버지는 좌파로 분류돼 몇 번의 훈격 심사에서 탈락되고 만 것이다. 이윽고 2005년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하지 않았을 경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라 해도 서훈을 줄 수 있도록 정부가 최근 관련규정을 변경함에 따라 지난 3.1절에 독립유공자 165명 가운데 좌파 계열로 구분되는 54명에게 서훈을 추서했다. 그동안 서훈이 보류돼 왔던 아버지 김지태 선생이 우리지역 좌파 독립운동가로는 처음으로 서훈이 이뤄졌던 것이다. 이는 재판기록을 찾은지 30여년만의 일이다. 반공 이데올로기 벗고 좀 더 균형잡힌 사회 계기되길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독립을 위해 영육을 불살랐던 애국지사 김지태. 김갑곤· 김희곤 선생.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잘 알지 못한다. 해방뒤 분단과 냉전체제를 거치며 그들이 일제의 고문으로 숨져가면서까지 지키려했던 숭고한 독립정신과 항일투쟁사는 송두리째 ‘빨갱이’ 란 낙인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3.1운동을 통한 조선독립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내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에 대한 사상적 회의에 빠졌다. 그러던 1917년 10월 일어난 러시아혁명의 물결은 급격히 조선에 스며들면서 사회주의 사상은 지식인들에게 민족해방운동의 또 하나의 이념적 무기로 자리잡았다. 이는 곧 복음이었다. 그동안 잊혀져왔고 잊혀지기를 강요당해왔던 사회주의운동,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애국지사 추서는 우리사회가 그동안 극악한 반공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좀 더 균형잡힌 사회로 나아가는 과거청산의 의미와 우리지역 근현대사를 바로잡는 ‘역사바로 세우기’ 의미 또한 내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김영재 씨는 “내가 아직 살아있어서 이렇게 좋은 날을 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숨겨진 우리지역 독립운동가들이 많을 겁니다. 현재 유족들은 나이가 많거나 실질적으로 능력이 되지 않아 사료수집 등 공적을 직접 밝혀내기가 싶지 않습니다. 정부나 자치단체가 역사학자나 향토사학자들을 지원해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라는 당부를 빼놓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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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5년 08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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