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39> “나는 평생 버꾸잽이, 버꾸놀이가 내 인생 자체요”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39> “나는 평생 버꾸잽이, 버꾸놀이가 내 인생 자체요”
  • 광양뉴스
  • 승인 2015.03.27 19:27
  • 호수 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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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버꾸놀이 명인 양일주 옹
광양 버꾸놀이 명인 양일주 옹
양일주 옹(80, 광양읍 목성리)은 올해 여든이시다. 한겨울에도 땀이‘뻐석뻐석’나는 버꾸를 70여 년째 치고 있다. “나가 이리 건강헌 것은 다 버꾸때문이요. 몸이 찌뿌등허다가도 연십을 허먼, 사층까지도 드르르 올라가뿌요.” 그렇다고는 해도 팔순의 연세라,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보니, 숨도 가쁘고 다리에 힘도 풀려서 놀이판에 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고 하신다.

“광양버꾸는 특이헌 것이 많소. 엎지서 뿔뿔 김시로 버꾸를 치지. 또 나무 테두리를 긁고, 가운디 까죽을 때림시로 장단을 맹그는디. 딴디서는 가운디만 뚱, 뚱, 뚱, 때린께 쪼깐 심심허지.”

무거운 북을 팔꿈치와 팔목에 걸어놓고, 허리를 굽혀 납작 엎드린 자세로 북춤을 추다보니 체력적으로도 에너지 소비가 크다고 한다.“옛날, 한창 배울직에는 틀리먼 기냥 발로 탁 차부러요. 북을 보듬고 그대로 바닥에 착 궁굴아져뿔지. 요새 같으먼 큰일 날 소리지잉.” 낮은 자세도 자세려니와 부들상모(개꼬리상모)까지 돌리다보면 신명이 있지 않고는 아무나 못할 일이다.

왜 광양버꾸놀이인가?
 
『광양 풍물굿의 북놀이인 버꾸놀이는 이 지역에만 형성된 독특한 가락이다. 버꾸잽이들의 기량과 가락, 몸짓이 뛰어나며, 힘있고 남성적인 가락과 춤사위가 호전적이기로 정평이 나 있다.
 

 광양 풍물굿 중 용강풍물굿을 예로 들자면, 용강풍물굿은 크게는 두레굿, 걸립굿, 판굿, 마당밟기굿의 네 가지로 구분된다. 그 특징 중 하나가‘개인놀이’인데, 그 중 북놀이의 비중이 크다.

‘광양풍물굿’을‘광양 버꾸놀이’라고 일컫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특히 북 테두리를 “딱”하고 울렸다 누벼 치는 기법이 있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서는 없는 독특한 가락이다.

 또 다른 특징은‘김 매기 할 때의 풍물굿’인데, 김매기가 끝나면 농군들이 풍물패로 변하여 부락 간에 풍물굿 접전을 벌였다. 양편이 용기(덕석기)를 앞세우고 영기를 양쪽에 꽂아서 진을 만들고 나발을 불며 접전을 치르는데,‘고춧가루 서 말을 먹고 뻘 속 30리를 긴다.’는 광양 사람들의 승부근성을 잘 드러내주는 놀이였다.』 (광양 용강풍물굿 연구. 광양버꾸놀이 보존회 양향진)

“여수나 강진 저 짝도 광양버꾸 비슷허니 치는 가락이 있지마는, 가락이 재미지기로는 광양을 못 따라와. 아, 뚱 뚱 뚱 때리는 것이야 애기들도 헐 수 있지. 광양버꾸는 잔가락이 많아서 에롭당게. 그래 끈허니 배워야헌당께.”

어릴 적 기억에 동네 어른들이 틈만 나면 매구를 쳤다고 했더니 양 옹이 허허 웃으신다. 정월 세배 끝나고부터 버꾸를 노는데, 하얀 문종이에 고운 물을 들여 고깔을 이루는 일부터 시작을 하였다. TV도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어서 그야말로 버꾸놀이는 최고의 마을놀이였다.

   쥔 쥔 문여소
   문 안열먼 갈라요

당산굿, 동네새미굿을 하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정짓굿, 조왕굿, 장끄방굿, 새미굿, 헛간굿, 뒷간철령굿, 마당밟기굿을 하였다. 부잣집에서는 큰 쌀그릇에 돈을 내어주고, 가난한 집에서도 요즘 돈으로 오천 원 이상은 담아 주었다. 그 돈은 동네 기금으로 쓰기도 하고 풍물을 장만하는데 쓰기도 하였다.

풍물굿은 크게는 정월, 단오, 백중, 추석 등 명절에 주로 벌어졌다. 굿 가락에 사람들 가슴이 모두 벌렁벌렁해져서는 굿판으로 뛰어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으니, 건강하게 희로애락을 발산시키는 장(場)이었던 셈이다.‘논다 하는’동네 사람들과‘논다 하는’상머슴, 꼴머슴들이 먼저 시작을 하면 동네 꼬마 녀석들, 강아지들까지 우쭐거리며 풍물패 뒤를 따라 다녔다.

잡색이라고 하여, 각시나 할미, 꼽새, 중으로 분장을 한 사람들의 익살스러운 춤사위에 신명나는 가락이 어우러지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굿판을 핑핑 돌았다. 

   매구여~~~~
   어 이 ~~~~
   오방신장합다리굿에
   잡귀 잡신을 몰아내고
   명과 복만 쳐 들이세
   명과 복만 쳐 들이세
 
마을 어느 집에 제사가 있던 날은, 제사 지낸 집에서 보내온 술밥을 먹고, “매구 치러 가자!”하고는 또 북을 치켜들었다. 버꾸놀이가 절정에 이르는 대목은 징, 장구, 쇠 소리를 다 죽이고 버꾸잽이들만 버꾸를 노는 순간이다.

귀에 들릴 듯 말 듯 시늉만의 소리를 내다가 큰 파도가 부서지듯 격정적인 소리를 내는데, 버꾸잽이들의 발은 구름을 탄 듯 재재거리고, 사뿐거리고, 살짝살짝 절제된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면서 어깻죽지를 추켜올리는 품새는 학처럼, 봉황처럼, 황소처럼 지그덩거렸다.
 
나는 북치는 사람
 
“그런데 왜 버꾸라고 부릅니까? 버꾸라면 바보라는 말이지 않습니까?”“허어, 버꾸를 아요? 옛날 말인디. 긍께 바보시런 사람헌티‘이 버꾸야~’허고 불렀는디. 왜 북을 버꾸라고 허는지는 나는 모르겄소. 해도 북이라 그러먼 쪼깐 싱겁고, 버꾸라 해야 신명이 나지.”

팔순의 연세에도 아직 버꾸 이야기에 신명이 돋는 양 옹. 대회 나가면 다른 어느 곳보다 우리 광양 굿판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이라고 하였다. 무대 위에서 풍물을 노는 것도 광양버꾸 뿐이라고 하였다. 먼 곳에서는 알아주는 광양버꾸를 정작 내 고장에서 몰라주는 것이 서운하다면 좀 서운한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보다 조금 못하거나 비슷해 보이는 단체도 문화재니 뭐니 해서 대접을 받는데’, 조금 서운하지마는,‘이녁이 좋아헝께, 문화유산잉께, 맥을 끊으먼 안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남은 살 먹어 용강 살 때, 어른들 따라다니며 배운 풍물이 평생이 되었다. ‘잡색춤도 조깐 헐 줄이야 알지만, 나는 북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양일주 옹. 양 옹의 표정에서 회한을 엿본 것은 필자의 노파심이었을까. 버꾸를 놀 줄 알던 동년배들이 다 돌아가시고, 하려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전수관 조차 없어 이대로 맥이 끊길까 하는 걱정이 어쩔 수 없는 탄식처럼 새어나왔다.
 
아들 양향진 씨와 양일주 옹.
 
누군가의 희생이 아니라
 
 버꾸는 바보, 장승이라는 뜻의 전라도 방언이다. 왜 하필 버꾸인가? 동네북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나, 어느 때나 칠 수 있는 북이라고 해서 버꾸란다. 물론 법고(法鼓)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고 한다. 가락이 법고와 유사하다고 한다. 임란과 정유재란 당시 광양은 수군들이 많았고, 노를 젓는 데는 일정한 가락이 필요했다. 뱃군들의 호흡을 맞춰 주었던 북소리, 그 소리가 지금의 광양 버꾸가락에 녹아들지 않았을까, 추론을 한다. (광양 버꾸놀이 보존회. 양향진)

 필봉농악, 이리농악, 삼천포농악, 평택농악, 밀양백중놀이 등 이미 유명한 타 지역 풍물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광양버꾸놀이. 전라도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가락과 경상도의 남성적인 힘이 배여 접경지역 특유의 가락을 만들어낸 광양북춤(밀양오북춤과 광양북춤의 음악적 비교연구. 부산대 박사과정 서정매)은 보존 전승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멋들어진 문화를 제대로 전수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아니라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전승력을 키워줘야 할 것이다.    

정은주(광양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