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칼럼] 과골삼천(踝骨三穿): 복사뼈가 세 번 구멍나다
[고전칼럼] 과골삼천(踝骨三穿): 복사뼈가 세 번 구멍나다
  • 광양뉴스
  • 승인 2024.06.28 18:24
  • 호수 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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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일 칼럼니스트 / 자기개발서 작가

 

이경일칼럼니스트 / 자기개발서 작가
이경일칼럼니스트 / 자기개발서 작가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여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이야기다. 개인 저작으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할 정도이며 분량뿐만 아니라 수준도 매우 우수함을 보여주는 명저들이다. 10세 때 처음으로 만든 삼미자 집에 시를 지어 쌓아놓은 종이가 자기 키 만큼 되었다고 하니 어려서부터 소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마를 앓으면서 눈썹 사이에 흉터가 점(點)이 되어 애칭으로 눈썹이 세 개라며 삼미(三眉)라고 부르기도 했다. 4살 때 《천자문(千字文)》을 읽었으며 7살 때 지은시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소산폐대산(小山蔽大山) 원근지부동(遠近地不同) 이라고 시를 지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는 말인데 일곱 살 아이의 이 시를 본 부친 정재원(丁載元)은 약용이 수치(數値)에 밝으니 너는 숫자에 관련 있는 일을 하라고 했었다.

그랬던 정약용이 성인이 되어 벼슬살이를 했으나 정조(正祖)가 죽고 당파에 밀려 천주교를 접했다는 이유로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때 원망과 절망으로 세월을 보내기 쉽다.

그러나 정약용은 그동안 바빠서 마음 편히 책 한번 읽지 못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하면서 고통을 희망으로 승화시켰다.

가장으로서 처자식을 책임 져야 하지만 유배(流配)라는 벌로 떨어져 살아야함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고난을 즐거움으로 변화시켜 받아들이는 정약용다운 역발상이었다.

강진에 가서 만난 사람들 중에 황상(黃裳)이란 제자가 있었다. 15세에 다산을 만났을 때 황상에게 ‘부지런 하고 부지런 하고 그리고 부지런 하라’고 하면서 이른바 ‘삼근(三勤)’이란 가르침을 주었는데 나중에는 삼근이 ‘학문에 정진하라’ 는 말과 함께 열심히 부지런하게 세상을 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 많이 쓰인다. 다산 선생은 말로만 제자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몸소 삼근을 실천하면서 모든 성공하는 사람 뒤에는 남모르게 열정과 지극함이 담겨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산교육 이었다.

정약용은 부지런히 힘쓰고 정성을 다하여 책을 베끼고 제자들과 토론하며 함께 정립한 논지를 차곡차곡 정리하여 저술로 이어졌다. 이때 앉아서 책을 읽고 쓰고 토론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복사뼈가(踝骨) 세 번이나 구멍이(三穿)났다고 한다. 여기서 과골삼천(踝骨三穿)이 나왔다.

황상 선생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자는 아니지만 다산선생이 아니었다면 그냥 초야에 묻힐 사람이었다. 운명인지 숙명이지 당시 과거에 응시하지 못할 황상의 신분을 감안하여 다산 선생은 시(詩)를 쓰도록 해서 나중에는 훌륭한 시인이 되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치원유고》 속에 〈임술기(壬戌記)〉와 〈삼근계(三勤戒)〉가 있는데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황상 역시 다산의 ‘과골삼천’을 본받아 세상에 명성은 떨치지 못했지만 숨은 지식인으로 후세 지식인들에게 재평가받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

18년을 귀양살이 하면서 저술하지 못한 부분도 해배(解配)되어 고향에 돌아가서도 쉬지 않고 저술은 계속 이어진다. 고치고 보완라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며 완성도를 높여갔다. 75세까지 당시로선 비교적 장수한 편이지만 73세 만년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 들이 그를 실증하는 기록들이다. 손자 손녀들이 천연두와 싸우면서 고통을 겪으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항상 독서와 저술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단순한 지식을 얻기 위한 공부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터득하여 저서로 남겨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잘못된 학문을 지적하는 것에서 출발해 왜곡된 편견들을 바로잡기 위해 노년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자기와 노선이 다른 노론 벽파들이나 자기 자식 같은 젊은 사람들에게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항상 물어가며 올바름을 찾기 위해 자신의 저술을 수정해 나갔다.

다산은 천재성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인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7세 어린 나이에 지은 시를 보면 선천적으로 가진 재능도 남달랐다고 볼 수 있는데 거기에 ‘과골삼천’같은 부지런함과 끈기가 더해져서 위대한 저서도 남겼으며 우리들에게 귀감(龜鑑)이 된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10만 원짜리 지폐가 발행된다면 혹시 다산 선생이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