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변환점에 선 요즘에는 공부가 학령기의 학생이라는 특정 계층만 특정 시기에 하는 일이 아니다. 공부는 우리의 삶과 동일시되는 일, 인생 전반에 걸친 삶 그 자체가 되었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교육 프로그램이 성황을 이루고, 개인 유튜버의 활동으로 엄청난 교육 정보가 가득찬 세상이 되었다. 예전과 다르게 일반 시민의 지식수준이 높아졌다.
날이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모든 조직들이 ‘살아남으려면 공부해야 한다’ 등 위기 의식도 감지된다. 그러나 아직도 크게 변화를 보이지 않은 곳이 있다면 학교현장의 수업과 학급경영 분야가 아닌가 생각한다.
최근 상황은 일부 학부모의 악성 민원과 갑질로 교사들은 교육활동에 위축을 느끼고 있으며 권위 상실은 교직의 보람을 송두리째 빼앗아가고 있다.
교사는 학급 경영 전문가로 의사가 각 분야 전문가이듯이 중추적인 리더로 자신이 담당하는 교과목이나 학급경영을 통하여 실천하고자 하는 교육철학을 펼 수 있는 성스러운 곳이 학교가 아닐까.
그런데 요즘엔 교사의 말이 먹히지 않다보니 교실 현장은 질서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따라서 좋은 아침에 책을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하소연을 하는 교실도 있으니 말이다. 핑계는 있을 수 있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도전하는 과제를 교사 자신의 책임으로 알고 노력하는 교사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이니 교실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게 필자가 아는 학교 경영자의 한숨소리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교사의 지시에 반항하고 말 듣지 않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훈계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아이들에게 큰 소리를 지르는 것도 체벌을 하는 것도 불가능한 시대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각 개인이 안고 있는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공감하면서 개별적으로 한 사람씩 접근하는 길이 있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이고 정성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조직체든 그 구성원들의 해결을 위한 문제의식이 없이는 변화가 불가능하다. 정부, 지역교육청이 교육개혁을 아무리 강조하여도 교실의 변화를 주도하는 교사의 적극적 행동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교사의 자발성만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아이들에게 “배움이 삶이고, 변화의 시작이 깨달음”이라면 교사도 스스로가 이 맛을 보지 못하게 되면 교사 자신 스스로가 허무감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문제는 시작이다. 우리의 귓전에 익은 테레사 수녀의 보살핌은 단지 그녀가 마주친 한 사람 한사람에 관심을 보이고, 최선을 다해 애정을 쏟고, 정성을 다해 그들을 보살폈던 것뿐이었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사람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씩만….”
이것이 그녀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한 사람씩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는 영혼을 울리는 진정한 만남이 문제의 해결 열쇠였다.
1학기를 거의 마무리 해 가는 시점에서 아직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소통이 안 되는 학생에게 다가가 속삭여 보자.
“왜 오늘도 학교에 오는가?”,“왜 공부하는가?”만 묻지 않고 어떤 가시가 마음에 박혀 학교생활이 힘든지를 묻는 떨림으로 한 해의 전반전이 감동의 드라마로 끝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만의 무리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