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생활 견뎌 낸 역사…옛 사람 흔적 통해 또 다른 삶 발견”
“유배생활 견뎌 낸 역사…옛 사람 흔적 통해 또 다른 삶 발견”
  • 김영신 기자
  • 승인 2017.06.23 18:24
  • 호수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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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향교 유림대학 특별강좌‘광양의 유배인물 알기’…문학적 가치 뛰어나

우리지역 유배인물들을 발굴, 그들이 남겨놓은 문학적 가치를 통해 지역 역사를 되돌아보는 귀중한 자리가 열렸다.

광양에 유배된 인물들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이어진다면 또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문화와 역사를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광양의 유배인물을 찾아낸 한 아동문학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지역 유배인물들과 그들의 흔적을 살펴본다.   

광양향교(전교 조동래)는 지난 21일, 광양읍 유림회관에서 광양의 유배인물을 찾아서 정리한 김미정(49, 방과후 글쓰기 지도교사, 아동문학가)씨를 초청 ‘유배문화의 가치와 광양의 유배’를 주제로 유림대학 수강생 50여명을 대상으로 2017년 유림대학 특별강좌를 실시했다.

젊은 글쓰기 지도교사 김미정 씨는 칠순이 넘은 어르신들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 쑥스러웠지만 그동안 혼자서 열심히 찾아 낸 광양의 유배자들을 소개했다.‘유배’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로 중죄를 지은 자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 격리시키는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형벌이다. 조선 중반에 당쟁이 심화되면서 많은 유배자들이 생겨났다.

‘유배지’는 주로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경상·전라도였다.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 강진에서 목민심서 등 500여권의 저서를 남겼고 다산이 기거했던 다산초당에는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어 강진은 유배문학의 성지가 됐다.

광양에도 고산 윤선도, 송강 정철의 형 정자 등 이름 난 선비들이 유배생활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김미정 씨에 따르면 총 28명의 유배자가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유배를 살았는지 김미정 씨는 자신이 찾아낸 유배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시대별, 경력별, 직업별, 분야별로 정리하고 유배를 오게 된 스토리까지 간략히 정리했다.

전남 총 534명, 광양 28명

영·정조 때부터 증가

 

김미정 씨가 이날 강의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남지역으로 유배 된 인물은 총 534명으로 확인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14세기 30명, 15세기 82명, 16세기 28명, 17세기 31명, 18세기 178명, 19세기 196명, 20세기 16명 등으로 나와 있다. 특히 18세기 영정조 부터 늘어나다가 한말 고종 때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유배자들은 408곳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가장 많은 지역이 경상도로 81곳, 그 다음이 전라도 74곳이며, 충청도 70곳, 강원도 23곳 등의 순서다. 유배횟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전라도로 915회다.

그렇다면 광양으로 유배를 온 인물은 누가 있을까? 박준/이수공/이지실/조유례/조희민/정지/이익모/최자강/정홍익/김자점/윤선도/김간/이현일/이제만/김성탁/유자광/박의보/이수강/최신/정자/김흥근/안보천/정지문/노영서/정분/정사도/유진/김범갑 등 28명이다. 이 중 윤선도, 김자점, 유자광 등은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이다.

 

유배인물들의 다양한 사연

 

덕흥군 옹립사건으로 헌릉참봉, 신령현감, 비안현감을 지낸 고려 문신 박춘은 1365년 판밀직사사가 되었다. 그해 신 돈이 권문세족을 제거할 때 이구수·양백익·석문성·김수만·이령 등과 함께 모함을 받아 광양에 유배되었고 이듬해 강제로 머리를 깎이면서 열암사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연산군 10년이던 1504년에 사망한 문신 이수공은 형조정랑, 교리, 문학, 봉상시첨정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난언(조의제문)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고 이어 광양에 이배 되었다가 1501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김자점은 효종실록 7권, 효정 2년 12월 7일에 해원 부령 이영과 진사 신호가 상변하기를‘저의 장인인 전 감목관 조인필이 김자점(당시 김자점이 광양에 유배되어 있었다)과 더불어 서로 통하여 왕래하였는데 종적이 비밀스러우니 반역의 정상이 있는가 의심스럽다. 대신들이 김자점을 붙잡아 추고 할 것을 청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병조정랑, 한성부판윤, 장악원제조를 지낸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과 중종반정에 연루되어 훈작을 삭탈당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죽봉 김간은 조선후기 안동출신의 문신으로‘죽봉집’4권 2책을 남겼다. 이인좌의 난으로 광양에서 2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김간은 상소를 올리기 위해 준비한 과정부터 유배지 광양에 오기에까지 있었던 일을 서술한 일기‘광양적행일기’를 남겼다.

김미정 씨는 인터넷 자료를 기초로 조선왕조실록, 국립도서관, 문중 족보, 다른 지역 향토문화사 등을 일일이 확인해가며 광양의 유배자를 찾았고 그들이 남긴 글들도 어렵사리 찾아냈다.

 

멀리서 마중 나온 너를 보니 

처연히도 내 마음이 느꺼워라

가을바람 속 이내 작별하니

나도 몰래 눈물이 갓 끈 적신다

 

이 시는 이현일 선생의 유배시다.

손주‘익’이 순천 송령 아래서 나(이현일)를 마중하였는데 완연히 그 아비(이현일의 아들)의 모습을 대하는 듯 하기에 감회의 눈물을 흘리던 나머지 이 시를 써서 손자에게 주었다고 기록돼 있다. 손자의 얼굴에서 아들의 얼굴을 읽은 이현일 선생의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시다.

김미정 씨는 옛 사람의 진한 감성이 배어 있는 이 시를 읽을 때 마다 코끝이 찡해온다고 한다.

 

“발품판 노력 보람…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지역 역사와 문화,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김미정 씨가 처음 유배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아동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이들의 글짓기를 지도하는 사람으로서 아이들에게 광양의 역사와 문화를 다른 방법으로 가르쳐 주고 싶어서였다”며“가족과 떨어져 유배생활을 견뎌 낸 옛 사람의 흔적을 찾는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삶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조동래 광양향교 전교는“팔순을 넘긴 자신도 광양에 유배인물이 윤선도, 정자, 이현일 등 3명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28명이나 된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젊은 사람 혼자서 그 많은 유배인물을 찾아내서 정리했다는 것에 대해 놀랐다”고 말했다.

조동래 전교는 또,“김미정 씨가 발굴·정리한 유배인물 자료는 아직 미숙한 부분이 있지만 심층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기초 자료는 물론 유배인물의 연대별 정리를 통해 광양의 역사문화를 알 수 있고 광양의 정체성을 찾는데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고 김 씨를 칭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