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후 애국지사, 유품 수백여점…광양 떠난다
김상후 애국지사, 유품 수백여점…광양 떠난다
  • 김호 기자
  • 승인 2024.04.22 08:30
  • 호수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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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관리 수장고 등 시설 없어
한국학 호남진흥원에 5년 기탁
시 “도선국사 사상수련관 추진”
설계용역 중, 2026년 준공예정
△ 후손 김형택 씨가 집에서 보관하고 있는 김상후 선생의 유품들.
△ 후손 김형택 씨가 집에서 보관하고 있는 김상후 선생의 유품들.

광양의 3·1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옥룡 출신 애국지사 금호 김상후 선생이 남긴 수백여점의 소중한 유품들이 타향으로 떠날 처지에 놓인 것으로 확인돼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광양에는 선생의 유품들을 보존·관리할 수장고 등의 시설이 없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수백년된 문화재급 유산을 비롯한 보존 가치가 높은 유품들이 자칫 훼손될 수 있어 더 이상 집안에서 보관하기 힘들어진 것.

그동안 유품들을 소장해 온 후손 김형택 씨는 조부의 유품들이 광양에서는 보존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한국학 호남진흥원으로 보내야 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김형택 씨는 “약 20년 전부터 광양시에 할아버지 유품들을 비롯 많은 지역의 집안들에서 소장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관하거나 좋은 환경에서 상시 전시할 수 있는 시설 마련을 요청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며 씁쓸해했다.

이어 “저희 집도 4대째 살고 있는 오래된 한옥이라 장소도 비좁고 여름 습기 등으로 갈수록 보관이 힘들어 결국 잘 보존해 줄 수 있는 좋은 시설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며 “5년이라는 기간이 전제됐지만 기약할 수 없는 일이라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김 씨에 따르면 한국학 호남진흥원 관계자들이 지난 18일 옥룡을 방문해 김상후 선생의 유품들을 직접 확인했으며, 오는 26일 유품 전체를 옮겨가서 앞으로 5년간 기탁·보존하게 된다. 

한국학 호남진흥원은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가 2018년 공동 설립한 호남지역 한국학자료에 대한 조사·수집·보존·연구 기관으로 기탁된 유품들은 이곳 수장고에 보관되면서 유품의 가치와 각종 조사와 학술연구가 이뤄질 예정이다.

김 씨가 소장해 온 김상후 선생의 유품들은 정조대왕이 하사한 내사본을 비롯해 광양유생 20여명이 조정에 올린 200년 넘는 상소문 △3·1만세운동 관련 판결문 △수형인명부 △소치 허련 그림 △매천 황현 글씨 △교지 △서한문 △병풍 등 수백여 점에 이른다.

한편 광양시에 확인 결과, 시민들이 소장하고 있는 지역 문화자산에 대한 보존 및 전시, 관리를 위한 시설인 도선국사 사상수련관 설립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2010년 시작된 해당 사업 역시 여러 이유로 10여년 이상 지체돼 오다가 최근에서야 정상 추진되고 있었다.

시 관계자에 따르면 옥룡면 추산리 일대에 건립 예정인 도선국사 사상수련관은 오는 9월까지 일정으로 현재 설계 용역 중에 있다.

이후 전남도 설계심사와 내년도 본예산 수립 등의 절차를 거쳐 내년 상반기에 착공해 2026년 하반기에 준공될 예정이다.

시 관계자는 “아직까지 우리 지역에 수장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시민들이 소장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자산들을 보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도선국사 사상수련관 내에 수장고를 비롯 전시관과 교육 공간 등이 들어서는 만큼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문화도시 지향 무색한 광양시

지역 문화자산 보관시설 시급

 

한편 문화도시를 지향한다는 광양시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정작 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는 귀중한 문화자산에 대한 소중함은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목소리다.

한 지역 향토 문화가는 “이번 김상후 선생의 유품들이 한국학호남진흥원으로 옮겨가야 하는 현실이 바로 광양시의 문화자산에 대한 아쉬운 인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이어 “김상후 선생의 유품 뿐 아니라 시민들이 집에서 소장하고 있는 소중한 역사적 유물들이 훼손되고 버려지기 전에 보존과 관리를 위해 시가 나서 시설 마련 및 관리, 전시 등을 위한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 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광양시는 그동안 사진가 이경모 선생이 남긴 카메라들과 사진들, 서예가 주계문 선생의 벼루 등의 수집품 등 귀중한 문화자산들을 둘 곳도 없었고, 시설을 제공할 의지도 보이지 않아 결국 타지역으로 떠나게 했다는 오명을 들어야 했다.

특히 정채봉, 김승옥 등 보물 같은 광양의 문학 자원 또한 타도시에서 문학관 등의 이름으로 조명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는 지적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나가 최근 지역 이슈인 ‘국보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제자리 찾기 사업’이 문화재청이나 국립광주박물관의 난색으로 10여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이유 역시 ‘놓일 장소’와 ‘원형 보존 시설 공간 부재’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 지난 2월 광양역사문화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김상후 선생의 유품 전시회.
△ 지난 2월 광양역사문화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김상후 선생의 유품 전시회.

광양 3·1만세운동 이끈 김상후 선생

조국 독립 위해 한평생 바쳐

△ 금호 김상후 선생.
△ 금호 김상후 선생.

금호 김상후 선생은 광양의 3·1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주요 인물이다. 그는 1870년 옥룡면 상평에서 출생해 1890년 21세에 순릉참봉에 임명됐다.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이 가속화되자 금호 선생은 광양에서 금호학숙을 설립해 애국계몽운동을 주도, 후진 양성을 통해 국권을 수호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등 서울, 광양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일제의 잔인한 식민통치에 반발하는 3·1만세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이에 김상후 선생 또한 광양군민 1000여명과 함께 1919년 4월 1일 광양읍 빙고등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광양시장까지 거리행진에 나섰다. 그러나 선생은 친일 인사들의 고변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8월형을 언도 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후에도 일제에 굴하지 않고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1934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배후자로 지목돼 전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살아생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으나 안타깝게도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4년 75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그는 2002년 국가유공자로 등록돼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