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41> “우리 부락민이 두 달간 미쳐버렸지”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41> “우리 부락민이 두 달간 미쳐버렸지”
  • 광양뉴스
  • 승인 2015.04.20 11:05
  • 호수 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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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월 전어잡이 소리 보존회’김봉래·서형일

 


젓꾼들! 선창에 다 왔는가? (어이!)
도붓꾼, 전어 받으러 나오시오!
젓꾼들, 한 잔씩 먹고 고기를 빨리 푸세!
어이야 디야 어이야 디야 어이야 디야! (어기낭창 가래야!)
이 가래가 뉘 가랜가? (어기낭창 가래야!)
진월하고도 신답 가래 (어기낭창 가래야!)
젓꾼들은 고기를 퍼서 (어기낭창 가래야!)
도붓꾼들에게 만썩 주소 (어기낭창 가래야!)
도붓꾼들은 고기를 가지고 (어기낭창 가래야!)
돈도 바꾸고 곡식도 바꾸고 (어기낭창 가래야!)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된‘전어잡이 소리’마지막의 한 대목이며, 소리 보유자 김봉래 씨 구술이다. 사라질 뻔한 민요가 주민들의 노력으로 전수되고,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생활양식이 급변하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손 놓고 잊어버리는 문화유산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지도 못한다. 진월 전어잡이 소리의 보존에 열정을 쏟은 소리꾼 김봉래(68) 씨와 보존회장 서형일(61) 씨의 활동은 참 좋은 사례다.

진월 전어잡이 소리 보존회 구성 

 

 

서형일 씨.

1996년 김옥현 시장이 진월 전어잡이 소리 보존 활동을 권했다. 전어배도 있고 놀이하는 소리꾼이 네 분이나 있는데 잊어버려서야 되겠느냐면서. 80년대 광양제철 공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노 젓고 그물질하면서 부르던 가락이 귀에 쟁쟁한 신답과 선소 마을 주민 23명이 보존회를 구성했다.

97년 망덕 앞 물 위에서 처음 공개 시연을 했고, 제25회 전남민속예술축제 민요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그 상 받은 것을 기념하여 진월 전어 축제를 열게 되었고.

전어잡이는 섬진강 하구 진월면 주민들의 전통적인 생계 활동이었다. 해방 전에는 배 한 척으로 고기잡이를 하다가 해방 후 2척의 맞조리로 변했다. 60년대 후반에는 나이론 그물을 써서 전어잡기가 수월해졌고, 70년대 중반부터 동력선을 활용했다.

그때 전어배를 타는 것은 요즈음 기업에 입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개 15세 무렵 배에서 밥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이삼십 년 경험을 쌓으며 작은 뱃사공에서 큰 뱃사공까지 단계적으로 커 간다.

전어를 잡는 지역은 광양만과 사천만이 중심이고 가막만으로도 나갔다. 해마다 첫 출항 때는 무속인을 불러 풍어제를 지냈고 노량을 지날 때는 다른 지역으로 나가므로 큰 뱃사공이 용왕님께 제를 지내고 갔다.

 

 

 

 

김봉래 씨.

배를 타고 나가서 한 물 때를 이용해 전어를 잡아 당일에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었고, 못 잡으면 하룻밤을 배에서 보내고 두 물 때를 보기도 했다.

배에서 그물질 할 때는 전심으로 합력해야 한다. 서로 호흡을 맞추려 악을 쓰고 욕을 입에 달고 산다. 그물을 재빨리 놓고 최대한 빨리 당겨야 이동하는 전어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당기면 그물이 까져 버린다.

그물질 할 때도 한 사람은 노를 젓고 배를 운행해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다. 전어를 배에 가득히 잡아 만선이 되는 것을 기를 꽂는다고 하는데, 단 한 번의 그물질로 만선이 되어 기를 꽂는 때가 있다.

그러면 밥그릇까지 두드리며 만선의 즐거움을 누렸다. 일하면서 손발을 맞추던 소리와 장단, 만선을 한 기쁨으로 어울리며 노래하던 것이니 축제에는 안성맞춤이다.

 

 

나도 미쳤지만 부락민이 다 미쳤지 

2012년 10월 제38회 전남민속예술축제에‘진월 전어잡이 소리 보존회’가 광양 대표로 참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신청을 할 수가 없었다. 전어잡이 소리꾼 김은배 씨가 5월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양시청 담당 공무원은 전남민속예술축제에 참가 신청을 해놓고, 광양에서 열리는 축제이니 출연을 준비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뜻하지 않게 축제를 준비하게 된 두 달 간. 신답 마을 사람들은 비상사태였다. 2007년까지 전남민속예술축제 6회의 입상 경력은 있지만 소리를 이끌어준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셨으니. 1년 전 전어축제 시연을 준비하면서 김은배 씨가 병원에 간 동안 녹음 자료에 맞춰 연습하느라 힘들던 기억. 그때 김봉래 씨는 인천에 가서 사업을 하는 중이었고.

다행히 김은배 씨가 수술 날만 정하고 축제 사흘 전에 돌아와서 전어축제는 무난히 넘겼던 것. 하지만 이젠 보존회에 참여하는 온 마을 사람들이 새롭게 출연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김봉래 씨는 14살부터 20년 동안 배를 탔고 소리꾼들의 수제자로 지목받으며 보존회 초대회장을 10년까지 맡았다.

전어잡이 소리를 어울려서는 불렀지만 혼자서 앞소리를 완창한 적은 없는데 앞소리의 책임자가 되었다. 김 씨는 도로공사 나들목에서 과적 단속원으로 근무를 하는 중에도, 도로변 좁은 사무실의 문을 닫고 소리 연습에 빠졌다.

 

 


혼자 고함을 지르며 땀을 쏟으니, 영락없이 미친 사람이었다. 소리꾼의 책임 의식은 집중력을 더했고, 새로운 소리꾼 김 씨와 함께 60여 명의 참여자들이 두 달 동안 연습에 몰두했다. 김 씨는“그때 나도 미쳤지만, 부락민도 두 달 간 미쳐버렸지”하며 미소 짓는다. 그리하여 전남민속예술축제에서 진월면 풍물단과 협연을 하여 으뜸상을 받았고, 13년 전국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서형일(61) 씨는 2011년부터 보존회장을 이어받았고 마을 이장도 맡아서 행정 업무까지 뛰어다녔다. 광양기업에 22년을 근무했기 때문에 컴퓨터를 활용하여 문서를 처리하고 민속축제에서 요구하는 동선도 작성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나가는 전국대회는 기대가 높아진 만큼 준비하는 부담도 컸다. 13년 사육하던 소의 사료까지도 다 구입해 놓았지만, 소를 팔아버리고 전국대회 준비에 매달렸다.

시청에는 백 번도 넘게 쫓아갔다. 2013년 9월 30일은 억수비가 내렸지만 전국대회 마지막 리허설을 진행했다. 담당 공무원 탁영희 씨는 빗속의 연습에 감동하고 어른들이 감기 걸릴까 염려하며 라면 1박스를 사서 뜨겁게 끓여주었다.

김봉래, 서형일 두 분이 축제 준비를 이끌어 가니 보존회원들은 연습 시간을 앞당겨도 빠짐없이 나왔고 최선을 다했다. 신답 부락민이 일치단결하여 공연한 전어잡이 소리는 제54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금상 작품이었고 김봉래 씨는 연기상까지 받았다.

한 마을 주민들이 미칠 수 있는 생활 전통이며, 어부들의 노동요라는 희소성이 빛을 본 것이다.

 

 

 


무형문화재 보존을 위한 과제

2013년 12월 19일 전어잡이 소리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을 받았다. 전통문화의 불모지에서 사라져가던 소리를 되살렸고, 보존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 가능해졌다. 두 분은 전어잡이 소리가 생활문화의 전통을 잇기 위해 세 가지 방향의 지원을 바라고 있다. 

우선 전수관이다. 소리의 현장인 바다를 잃었으니 전수관에 모여 소리를 이어가야 한다. 그리고 어업 활동에 쓰던 도구들이 멸실되기 전에 모아서 보관해야 한다.

오색기를 비롯한 어구를 보관하고 있으나 조금 지나면 헌 옷가지도 못 구할 것이다. 두 번째로 원래의 전어잡이 배를 만드는 일이다.

민속예술축제에 사용한 배는 원형이 아닌 전시용이다. 맞조리 하던 2척을 만들어 마을 앞 섬진강에 띄우면 실제적인 활동거리가 생길 것이다. 그것이 세 번째로서 전어잡이 체험을 6월~10월 중에 진행하는 일이다. 마을 앞 섬진강휴게소 옆에 선착장이 있으니 전어잡이 체험 관광을 펼칠 수 있다.

그동안 추진된‘전어 축제’를‘섬진강 문화축제’로 변경한다지만 이 같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내용이 더해져야 축제의 가치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2010년과 2012년 필자가 김봉래 씨와 서형일 씨를 대담했을 때는 전어잡이 소리꾼들이 세상을 떠나서 보존이 매우 어렵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2012년과 2013년의 빛나는 결실을 거두고 2세대 소리꾼 김봉래 씨 뒤를 잇는 3세대 소리꾼 박정호(56) 씨도 발굴되었다. 이렇게 생활문화가 잊혀질 위기에서 시작된 전어잡이 소리 보존회 활동은, 광양 어민들만의 고유한 흥과 멋을 무형문화재로 보존하는 기틀이었다.

박두규 광양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