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18> 광양 기정떡, 어머니 손맛이죠!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18> 광양 기정떡, 어머니 손맛이죠!
  • 광양뉴스
  • 승인 2014.10.27 09:59
  • 호수 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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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조 광양 기정떡집 박 용 기 씨 -

 

원조 광양 기정떡집 박 용 기

광양을 상표로 내세우면 알아주는 농산품이던‘광양 밤’은‘광양 매실’로 자리를 바꿨고,‘광양 숯불구이’와 섬진강의 제첩은 광양이 자랑하는 전통적인 먹을거리다.


이에 더하여‘광양 기정떡’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말만 들어도 입안에 군침이 돌게 마련이다. 밥 위에 찐‘보리 개떡’도 즐겨 먹던 시절, 쌀로 만든 시큰한‘술떡’은 그야말로 별미였다.

광양읍에서 생활한 사람들에게 기정떡은 향수가 듬뿍 서렸다. 배고프던 시절, 쌀이 들어간 기정떡은 설날의 찰떡과는 다른 맛으로 신비했다. 제사 때에도 기정떡에 손이 제일 먼저 갔고, 여름철의 꿀맛으로 생생하다.

이러한‘광양 기정떡’은 가정집에서 손으로 만들어 공급하는 식품인데, 어떻게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을까.
 

어머니 솜씨에서 나온 맛

여름에 멥쌀을 가지고 솜씨 있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기정떡. 광양읍에서 이것을 널리 보급한 사람은‘원조 광양 기정떡집’을 운영하는 박용기(56) 씨의 어머니였다. 4년 전에 작고하신 박 씨의 어머니는 예전 광양읍사무소 뒷골목에서 당숙모 댁의 기정떡집을 돕다가 운영을 맡게 되었다.

1970년대 초부터‘매일 시장’이 가까운 곳이라서 날마다 기정떡을 만들어 팔았다. 광양 사람들이 알아주던 그 기정떡의 맛은 바로 어머니 손맛이었다. 어머니 솜씨가 다른 집의 기정떡과 맛의 차이를 내는 기술이었다.

기정떡을 사전에서는 ‘증편’이라고 하지만, 막걸리를 넣어서 독특한 쉰 맛을 보이기 때문에 여러 지방에서 ‘술떡’이라고 한다. 기정떡 재료는 쌀, 막걸리, 소다, 소금, 설탕이 전부다.

이 재료를 뜨거운 물에 반죽하여 발효가 되도록 하룻밤 재워 부풀리고 나서 찌면 된다. 발효 기술과 온도를 맞춰 주는 것이 생명이다. 옛날에는 가마솥에 장작불로 찌고 한여름에 솜이불을 감싸서 발효시켰다. 이제는 기름보일러를 이용하여 온도 조절이 한결 쉬워졌지만 모든 공정이 사람의 노력으로 이뤄진다.

박용기 씨는 학업을 마치고 부산으로 가서 직장 생활을 하다 광양으로 돌아왔다. 물품 대리점 영업도 했고 광양제철 공장을 건설할 때 동부건설에 다녔다.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니 기정떡 만드는 일을 틈틈이 돕게 되었다.

중노동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일손을 도우며 손을 대기 시작한 기정떡 만들기. 가업으로 이어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기정떡을 찾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났다. 가게로 찾아오는 손님, 전화로 주문하는 분들, 이웃한 숯불고기식당에 오신 분들도 기정떡을 찾았다. 외지인들이 광양읍에 와서 돈을 쓰고 가는 곳은 숯불고기식당과 기정떡집이었다.

택배를 이용한 장거리 주문도 시작되었다. 이에 1991년부터 박용기 씨는 다른 일을 접고 어머니와 함께 기정떡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맛을 개발하고 분점을 내어서

박 씨는 기정떡에‘광양’이라는 상표를 붙여서 내보내는 자부심이 들었다. 광양 전통을 알리는 보람으로 사업의 확장과 성공을 꿈꾸었다. 두 가지 과제가 따랐다. 도시인과 아이들 취향에 맞게 새콤한 맛(쉰 맛)을 줄이는 것과 수요에 따라 대량 생산을 하는 것이다.

기정떡은 발효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부풀어서 부드럽고 여름철에도 쉽게 변질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독특한 쉰 맛에 옛날 사람들은 향수를 느끼지만, 지금의 도시 사람과 아이들은 친숙하지 않다. 음식이 상한 것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박 씨는 그 새콤한 맛을 줄이기 위해 연구했고, 증편 제조 방법으로 특허까지 냈다. 새로운 입맛에 맞는 순화된 맛이다.

다음으로 수공업 생산을 넘어서는 기계화와 자동화 문제다. 자동화 시스템을 만들어 보라는 친구 오영관의 강력한 권유로 6천여 만 원을 들여 기계를 제작하여 실험을 거쳤으나 실패했다. 발효시키고 찌는 일의 완전자동화가 어려웠다. 지금도 발효 과정의 반자동화 장치는 연구를 의뢰해 놓았다. 기계로 대량 생산을 한다면 백화점과 홈쇼핑 판매도 가능할 텐데.

1980년대는 감잎을 깔고 쪄서 고급스러운 맛을 제공했다. 입소문은 전국으로 퍼졌으므로 먼 곳의 택배를 우선해서 공급했다.

20년 사이 크게 늘어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분점을 내었다.‘광양 기정떡’을 순천에서는 동생과 조카가 각각 열었고, 여수와 광주에도 진출했다. 기술을 공유하여 분점을 내어줌으로써‘광양 기정떡’의 맛과 명성이 빨리 확산될 수 있었다.

필자도 10여 년 전, 순천에서 근무할 때 그곳에서 나온‘광양 기정떡’을 행사 때면 쓴 적이 있다. 가족노동의 수작업으로 생산하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독점을 버린 것이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다. 

박용기 씨의 아들 박회연(32) 씨도 혼인하여 3대째 기정떡 만드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딸은 미혼이지만 역시 일을 함께 하고 있다. 온 가족이 기정떡에‘광양’을 얹어서 파는 일에 종사한다.

광양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기정떡을 가업으로 이어가게 되었으므로 지역을 위해 좋은 일도 해보려고 한다.

일하는 식구들은 병신 됐고

기정떡 만들기는 밤새워 하는 일이라서 일꾼을 고용하기가 어렵다. 아침에 공급해야 하는 식품이므로 새벽 1시부터 일을 시작해서 정오까지 12시간을 작업한다. 잠을 제대로 못자고 밥도 제 때에 못 먹기 마련이다. 또한 쌀가루를 부시는 일에서부터 떡을 자르는 일까지 호흡을 맞춰줄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 더구나 벌이도 월급 줄 것으로 셈하면 얼마 되지 않는 셈이고.

미우나 고우나 가족들이 10년에서 30년을 넘겨 일하다 보니 팔과 허리에 고질병이 붙었다. 요사이 공정으로 40분에 두 판씩 나오는데 하루 평균 250판을 쪄낸다. 물론 명절에 수요가 많을 때는 700판까지도 공급한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떡 사러 오신 분들에게 물건이 없어서 빈손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특히 여수와 순천은 물론, 광주나 경상도에서 오신 분에게 줄 떡이 없을 때는 참으로 송구스럽다. 이런 속도 모르고 늦게 온 시민들은 물량이 없다는 데도 ‘뱃장 장사 하느냐’는 소리를 던져서 병신 된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한다.
 


기정떡을 하는 다른 집들도 늘어나서 좋다. 처음 시작했던 집을 비워주고 나왔는데, 그 집도 기정떡집을 계속한다. 지금의 장소로 이전을 하면서‘원조 광양 기정떡집’이라고 상호를 바꿨다.

5년 전에는 광양시와 지식경제부 지원으로 디자인과 포장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식품 명인을 신청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집안에서 이뤄진 일에 대한 근거 자료가 마땅하지 않다. 행정에서는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듯이 광양을 브랜드로 삼은 사업체에 대하여 명품을 유지하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면 좋겠다.

박용기 씨는 기정떡의 맛에 예민하게 영향을 끼치는 쌀에 주목을 한다. 사람들이 밥으로 먹을 때의 쌀은 찰기가 많아야 좋다. 그래서 개량된 벼는 찰기 많은 쌀이 주종이다. 하지만 기정떡 재료는 찰기 많은 쌀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쌀집에서 적합한 쌀을 구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한 집만의 수요로는 벼농사를 계약 재배할 만큼의 물량이 되지 않지만, 순천 여수 광주의 분점과 함께 하면 계약재배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우리 농산물 중에서도 광양 쌀로 빚은 기정떡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갈수록 쌀 소비가 줄어들어 농촌을 힘들게 하는 현실. 기정떡처럼 쌀 소비를 확산하는 식품은 농촌의 전통을 지켜주는 일까지 하는 셈이다. 농축산물과 식품산업에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수요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공산품과는 달라서, 식품산업은 한 쪽이 성공하면 다른 쪽은 망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기정떡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면서 더불어 성공의 길을 걸었다. 그것도‘광양’이라는 상표를 순천 여수 광주에까지 확산시키면서. 전라도도 경상도도 아닌 똑똑한 광양놈들이란 말이 기정떡 맛에서 느껴지는 것은, 필자 혼자만일까.

박두규 광양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