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유당공원은 5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곳이다.
유당공원은 1547년에 광양 현감 박세후가 광양읍성을 쌓고 멀리 바다에서 왜구들에게 성이 보이지 않게 나무를 심으면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조성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군사적 목적 외에 풍수지리적으로 칠성리의 당산이 호랑이가 엎드린 형국이고 읍내리는 학이 나르는 형국인데 남쪽이 허하다 하여 늪 지역에 연못을 파고 수양버들과 이팝나무, 팽나무를 함께 심었다는 설이 있다. 부족한 것을 보완한다는 비보풍수(裨補風水)와 함께 수구(水口)를 관쇄(關鎖)하는 풍수지리의 기본 원리가 적용되어 있기도 하다.
지리적인 위치와 조성된 나무 종류로 보아 바다와 가까이 있어 모래 날림 방지 기능, 해일 방지 기능, 염해 피해 방지, 토사 유출 방지 등 기능적인 목적도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유당공원의 조성목적과 기능을 살펴보면 오랜 전통을 가진 인공림으로 오늘날 전통 마을 숲으로 정의된다.
전통적인 마을 숲은 급격한 도시화와 토지 사유화 등의 여러 요인에 의해 사라지고 있으나 전국에 1000여곳이 남아있다. 대부분 그 조성목적이 광양 유당공원과 크게 다르지 않아 광양 유당공원은 그 고유성이 주목받지 못한 측면이 많다.
그런데 광양 유당공원에는 공원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어 있다. 공원은 도시계획학이나 조경학 등의 분야에서 전문용어로 사용되는 영어 퍼블릭 파크(Public park, 공공공간)의 번역어로 녹지의 한 형태이다.
퍼블릭(Public)에는 일반사람들, ‘대중의’라는 뜻이 있으며, 파크(park)는 영국에서 원래 공유지(common), 정원, 유원(遊園)이나 사냥터로 쓰인 말이다. 이 두 단어가 공원으로 사용된 역사는 1800년대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공원이라는 명칭이 부여된 역사는 짧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공원은 1888년에 조성된 인천의 자유공원이며, 이어 1897년에 서울탑골공원이 조성됐다.
일본에서도 공원은 유원(遊園) 등으로 사용되다가 1870년대 이후에 등장된 용어이다.
광양 유당공원은 1916년 부산일보에 달맞이를 했던 공원(釜山日報. 柳塘公園の觀月. 1916年9月18日)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해도 최소한 108년 이상 되어 호남지역 공공정원의 측면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다.
공원이라는 이름 못지않게 공원의 구성과 기능 측면에서도 매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유당공원은 과거에 유림공원(柳林公園: 조선일보, 1923.6.15.), 유림정(柳林亭: 동아일보, 1936.6.12.), 유담(柳潭: 조선일보 1939.8.16.) 또는 유담공원(柳潭公園: 조선일보, 1936.6.16.)으로도 불리었다.
이들 이름에는 공통적으로 버드나무(柳)와 못(塘, 潭)이 반영되어 있어 단순한 숲보다는 물(澤, 池)과 나무가 있는 정원의 형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그 유산은 현재도 전해지고 있다.
광양 유당공원은 운동경기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936년 6월 5일부터 8일까지 유당공원에서는 전조선궁술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관람객 7000명과 무사 160여명이 참가했다(동아일보, 1936.6.12.). 1923년 10월 28일에는 광양지역 연합운동회가 개최되어 3천여 명의 관중이 참가했다(조선일보, 1923.11.7.).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광양 유당공원은 공공의 정원 측면에서 매우 역사적인 현장이므로 광양시에서는 이에 관한 콘텐츠의 적극적인 발굴과 개발 그리고 요긴하게 활용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