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제323회 광양시의회 제2차 정례회에서 지역 사회의 눈길을 끄는 의견이 제기됐다. 정구호 의원이 5분 자유 발언을 통해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 ‘벤처기업 육성’을 주장한 것이다. 이르면 2026년부터 운영될 예정인 ‘광양시 체인지업 그라운드’를 염두에 두고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을 통한 산업 생태계 확장해야 한다는 점이 골자다.
해당 발언을 들은 정인화 시장은 지난 4일, 포항시를 찾았다. 정 시장은 1박2일 동안 체인지업 그라운드 외에도 주요 연구시설들을 견학했다. 이후 시청홍보실을 찾은 정 시장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신선한 충격’이라는 단어를 쓰며 ‘광양형 벤처벨리 구축’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더불어 김기홍 부시장과 관계부서장들에게 직접 ‘포항 방문’ 등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광양신문>은 직접 포항 체인지업 그라운드를 찾아 포항의 사례를 분석하고 ‘광양형 벤처벨리’에 대한 현 주소를 짚어보기로 했다.
갑자기 분위기 벤처기업?
광양시는 광양제철소 설립 이후 가파르게 인구가 증가했다. 제철소 건립 전인 1981년부터 2001년까지 6만여명이 증가하면서 전남에서 가장 인구증가율이 높았다. 다만 2010년 15만명을 돌파한 후 13년째 16만명의 벽을 넘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인구 감소추세로 접어든 상황에서 동일한 산업 구조로는 인구증가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특히 청년 인구는 ‘교육’과 ‘양질의 일자리’에 큰 영향을 받는다. 광양시 인구통계에 따르면 20대 인구는 가파르게 감소세를 보이고 있지만 취업적령기인 28~35세 구간에선 인구가 눈에 띄게 늘었다. 2021년 광양시 20대 인구비율은 12.8%, 2022년 12.5%, 2023년 11.8%까지 점차 줄었지만 28세에서 35세 구간에서는 2년간 1599명이 늘었다. 결국 20대 초중반엔 교육을 위해 떠나지만 일자리를 찾아 돌아온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산업 구조 다변화를 통해 청년층에게 양질의 일자리가 제공된다면 도시가 한 단계 도약이 가능하다는 점을 앞서 두 가지 통계가 보여준다.
벤처기업 협회가 실시한 2023년 벤처기업 정밀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벤처기업 종사자 중 70% 이상은 20·30·40대에 해당한다. 한 기업당 평균 25명이 종사한다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계산한다면 20곳의 스타트업 기업만이라도 광양 체인지업에 입주할 경우 500명 이상의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그래서 ‘체인지업 그라운드’가 뭐길래
‘체인지업 그라운드’는 포스코가 지난 2021년 약 830억원을 투입해 구축한 벤처 창업 인큐베이팅 센터다.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지하 1층부터 지상 7층까지 연면적 2800㎡의 대규모 시설을 건립했다.
개관 당시 입주한 기업 68곳의 기업가치는 4672억, 직원수는 596명이였지만 14개월만에 입주율 100%를 채우더니 지난해 9월 기준 입주 기업은 120여개, 이들의 기업가치는 1조4000억을 넘어간다. 졸업한 기업까지 포함하면 1조7000억에 근무 인원이 1440명을 돌파했다. 이곳에 입주한 스타트업들은 판로지원, 투자 연계뿐 아니라 시제품 제작이나 벤처 펀드 연계 등 다양한 지원을 받는다.
인재들이 서울과 수도권으로만 몰리는 현실에서 ‘체인지업 그라운드’와 같은 벤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은 지방에 새로운 창업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특히 스타트업의 경우 수도권에 집중된 투자 네트워크를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서울·경기권을 고수한다. 2023년 벤처기업 정밀실태조사 결과 벤처기업의 58.1%는 서울·인천·경기에 소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2021년 포항에 체인지업 그라운드가 개관한 후 입주 기업 사업장이 포항으로 본사나 지사를 이전한 기업은 24곳이다.
이들이 가진 기업가치는 총 5300억원에 달하며 포항에 제조 공장을 건립할 계획을 가진 곳도 7곳이다. 현재 연구 중인 기술이 향후 상용화 단계까지 이뤄진다고 가정하면 고용창출을 포함해 지역경제에 미칠 효과는 가늠하기도 힘들다.
‘체인지업 그라운드’의 성공 비결
포항 체인지업 그라운드가 창업 인큐베이팅 센터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데에는 포스텍과 RIST(포항산업과학연구원), 방사광 가속기 등을 기반으로 한 산·학·연의 유기적인 협력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3·4세대 방사광 가속기 등 2조원 규모로 세계 2위에 달하는 R&D시설과 5000여명의 석박사급 인력, 연간 1조원의 연구비 등 국내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인프라가 뒷받힘 됐다. 여기에 단순한 창업 공간 지원에 그치지 않고 22개 벤처 펀드를 조성해 자율적인 투자가 이뤄지도록 했다.
아이디어와 기술만 있으면 창업교육부터 법률지원부터 시작해서 시제품 제작 등 판로지원, 투자, 글로벌 네트워크 연계까지 지원되는 창업 지원 프로세스를 구축한 것이다.
세포를 활용한 바이오잉크로 3D프린팅 기술을 통해 인공장기를 만들어 내는 회사인 ‘바이오브릭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초 포스텍에서 개발된 바이오잉크 소재 제조기술은 수동으로 14일간 0.5g밖에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RIST에서 자동화 설비를 구축하면서 제조 효율이 50배 상승했다. 당장 활용이 가능한 양의 바이오 잉크가 생산 가능해지자 곧바로 벤처 창업으로 이어졌다. 현재 중소벤처기업부가 미래 유망 창업기업을 육성하는 ‘민간투자 주도형 기술창업 지원’프로그램인 TIPS에 선정되고 기업가치는 100억원에 달한다.
그런데, 광양엔 연구기반이 없다
‘광양 체인지업 그라운드’에는 포항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대학이나 연구소 등 원천 기술을 제공할 연구기관이 없다는 점이다. 당연히 운영 방식에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시설 규모에서도 차이가 크다. 광양시는 도시재생사업 일환으로 금호동 백운아트홀 인근에 2동짜리 건물을 건립하고 있으며 한 동은 체인지업 그라운드로 한 동은 주민 편의 시설로 사용될 예정이다. 다만 정인화 시장이 최근 관련 부서에 시설 확대 방안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규모에는 변동이 있을 전망이다.
박현윤 포스코 벤처지원섹션 차장은 “광양에서 벤처를 어떻게 활성화 해야하느냐를 두고 다양한 방안들이 논의되고 있다”며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인근에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는 시설과 광양 내 연구지원센터 등과 연구조합을 구성하는 방안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주민편의시설에 창의카페 등을 신설하고 창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거를 지원하는 등 지자체의 노력도 동반돼야 한다”며 “최근 글로컬30대학으로 선정된 순천대학교와의 연계, 포스코 벤처지원단 활용 등 다각도에서 논의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니 인터뷰 - 정구호 광양시의회 의원
“지역 미래 먹거리, 계속 발굴할 것”
지난 11월 정구호 의원은 우연한 기회에 ‘체인지업 그라운드’를 들었다.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정 의원은 곧바로 포항으로 향했다.
체인지업 그라운드를 둘러본 정 의원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아이디어들이 체계적인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거치며 하나의 거대한 산업생태계가 구축됐기 때문이다. 포스코 기업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다 인구 15만에 답보중인 상태에 놓인 광양시에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포항 견학 후 느낀 바를 지난해 마지막 정례회에서 주장했다. 5분 발언을 통해 △교육기관 및 연구기관 설립 △산학일체형 도제학교 확대 △실효성있는 지원정책 △벤처기업육성촉진 지정 등을 촉구했다.
이 발언은 지역 내 새로운 아젠다로 떠올랐고 결국 정인화 시장, 김기홍 부시장을 비롯 관계공무원들의 포항 견학에 이어 광양 체인지업 그라운드 확대 논의까지 이끌어 냈다.
정구호 의원은 남은 의정활동 기간 동안 이처럼 지역 미래 먹거리를 계속해서 발굴해 내는 것이 목표다. 지난 2022년에는 테슬라 한국 공장 유치시 광양이 최적지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정 의원은 “지나간 일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가 중요하다”며 “의회 기능인 견제와 감시에 충실하는 것은 기본이고 지역이 나아갈 방향, 지역의 미래를 놓고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는 의정활동을 계속해서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