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칼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구나
[고전칼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구나
  • 광양뉴스
  • 승인 2020.03.06 16:23
  • 호수 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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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일
연관단지 대한시멘트 1공장
이경일 연관단지 대한시멘트 1공장

꽃피는 춘삼월 사계절 중 봄은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시절임에도 2020년 봄은 우리나라는 물론 온 세계가 신종 코로나19로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본래 꽃샘추위가 있을 때 안타까운 심정(心情)으로 우리 조상들이 춘래불사춘 이란 말을 많이 써왔다.

그런데 지금이 진정한 춘래불사춘이 아닌가 한다.

꽃구경이나 모든 축제가 사라지고 매일매일 감염 확진자와 사망자만 늘어가고 있는 것이 정말 봄은 왔어도 봄답지 못한 봄인 것 같다.

이 말의 유래(由來)는 중국 한(漢)나라시절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4대 미인(美人)하면, 월(越)나라의 서시(西施),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 왕소군(王昭君), 삼국지(三國志) 에 나오는 초선(貂蟬), 그리고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양귀비(楊貴妃)이다.

춘래불사춘은 한나라 원제 때 왕소군의 이야기다.

중국 전한 시대 흉노(匈奴)와는 크고 작은 전쟁이 그칠 줄 모르고 한나라에게는 흉노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거칠고 포악(暴惡)하여 함부로 어찌할 수 없었던 흉노를 달래기 위해 화친(和親)을 하면서 한나라 공주를 흉노 왕 호한야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사실상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그런데 원제는 후궁(後宮)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후궁들을 불러서 인사를 시키는 과정(過程)에서 호한야는 왕소군을 보는 순간 반해 버리며“공주가 아니고 후궁이면 어떻겠습니까?”원제도 자기 딸을 오랑캐 에게 보내기 싫었던 지라 좋다고 했다.

호한야는 즉석에서“그 대신 내가 원하는 후궁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원제는 흔쾌(欣快)히 수락 했다.

그래서 호한야가 선택한 사람이 왕소군(王昭君) 이었다.

자기의 후궁 이였지만 원제는 한 번도 가까이서 실제로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원제가 왕소군 을 가까이 보니 절세미인(絶世美人) 이었다.

후궁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볼 수 없어 화공(畵工)에게 초상화(肖像畵)로 그려 올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최고의 화공이 모연수(毛延壽) 인데 후궁들은 화공에게 뇌물(賂物)을 주며 실제보다 더 예쁘게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미모에는 자신 있었던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았다.

화공은 예쁘게는 그렸으나 실수한 것처럼 일부러 얼굴에 점(点)을 찍어 추(醜)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왕소군은 출신성분(出身成分)도 가난하지 않은 양가(良家)집에서 태어나 괜찮은 편이어서 뇌물로 줄만한 돈이 있어도 미모에 자신이 있어 뇌물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원제는 연회가 끝나고 급히 처소로 돌아가 왕소군의 초상화를 대조해보았다. 왕소군의 초상화가 본래의 모습과 비슷하기는 한데 왠지 눈에 쏙 들어오지 않았다.

초상화는 그런대로 그렸는데 먹물을 일부러 떨어뜨려 점이 있는 것처럼 그려놓으니 황제 눈에 낙점이 찍히지 못했던 것이다.

황제는 혼수 준비가 아직 안되었다는 핑계로 3일간만 더 기다리라고하고 그녀에게‘소군(昭君)’이란 칭호를 내리며 3일 밤낮을 같이하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약속대로 왕소군이 흉노의 왕비로 가기위해 말에 올랐는데 원제가 보면 볼수록 땅을 치고 통곡할 지경 이었다.

저런 미인을 몰라보고 흉노에게 보내다니 며칠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왕소군이 왜 그렇게 그려졌는지 내막(內幕)을 알아보니 뇌물이 오간 사실이 드러났다.

당장 화공 모연수를 참형(斬刑)에 처하고 왕소군을 그리워 하다가 3년 후 죽고 만다.

한편 흉노와 함께 머나먼 여정에 오른 왕소군은 이국땅으로 가면서 슬픈 심정을 마상에서 비파로 이별 곡을 연주한다.

때 마침 위를 날아가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얼굴을 보고 미모에 심취해 날개 짖을 잊어버리고 그만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왕소군은 낙안(落雁)미인이 되었다.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왕소군이 뇌물을 주지 않아 물설고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은 곳에서 살아간 서글픈 심정을 약 600여년 후에 당나라 시인(詩人) 동방규(東方叫) 가 노래하며 지은 시를 소군원(昭君怨)으로 말해준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자연의대완(自然衣帶緩) 비시위요신(非是爲腰身)”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구나, 자연스럽게 허리끈이 느슨해지니 이것은 허리 몸매 위함이 아니었도다.

힘들게 살아간 왕소군은 흉노 땅에서도 삶이 순탄치 못했다. 호한야 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낳고 살다가 호한야가 죽은 후 한나라로 복귀할 기회가 있었지만 오지 못한다.

흉노의 풍습에 따라 호한야의 첫째부인 아들에게 대물림되어 살며 딸 하나를 낳고 나이가 들어 생을 마감한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간 왕소군은 정말 해마다 봄이 찾아와도 봄답지 못한 세월을 보냈을 것이라 짐작된다. 우리는 올 한해만도 이렇게 힘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