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지감의 늦가을 풍경이다. 시골 마을 마다 빨갛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수확기가 지난 감들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다 지친 모양새다. 사람도 없거니와 감 가격이 싸서 수확 품삯도 안 나올 정도라고 하니 나무에 있는 감들은 새들의 먹이가 될 듯하다. 감이 이렇게까지 푸대접 받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른 새벽, 떨어지는 감을 줍기 위해 눈을 비벼가며 감나무 밑을 지켰던 세대 분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마당가의 감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감은 배고픔을 달래주었고, 아이들 운동회 때 소중한 간식으로 사용됐다. 감을 판매한 돈은 수업료 등 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그러던 것이 주택개량, 원예품종의 도입에 의해 토종감나무들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원예종 감나무의 증가에 따라 감 수확량은 크게 늘었다. 배고픔의 시대도 끝났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반면에 정겹게 불렀던 물감, 동우감, 장둥이감 나무는 찾기 힘들게 되었다.
토종감에 대한 이름과 그에 얽힌 기억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유전자원과 토종감을 이용한 풍습 및 음식문화가 우리 시대에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광양도 이러한 현상의 예외 지역은 아니다. 상주감시험장에서 발행한‘감유전자원도감’에는‘광양밀수감’과‘광양장둥이’가 광양 토종감으로 기술되어 있다.
‘광양밀수감’은 진상면 백학동 백운산을 중심으로 해발 200m 내외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토종감이지만 육질이 치밀하고 연시, 건시가 되었을 때 꿀처럼 달아 백학동 일원(황죽리, 어치리)에서는 오래전부터 재배되어 왔다.
꿀같이 달다는 뜻에서 밀시가 되었으며, 밀수감 또는 밀시감으로 불러지다가, 꿀감이라는 이름의 특산품으로도 생산되고 있다. 다른 지역의 토종감에 비하면‘광양밀수감’은 보존이 잘 되고 있다. 꿀같이 달고 토종이라는 점도 마케팅에 활용되고 있어 당장의 소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문제는 ‘광양장둥이’와 미분류 된 토종감들이다.‘광양장둥이’는 일명 장뎅이, 장기감이라고 하며, 감모양이 길고 둥근 형태에서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연시나 곶감 등으로 사용되었지만 원예품종에 밀려나 쉽게 찾기 어려워졌다. 토종감은 현재 상주감시험장에서 조사한 것과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소에서 조사한 유전자원이 있는데, 양자 간에 조금 차이가 있다. 이는 밝혀진 토종감 외에 것들의 존재 가능성을 시사한다.
어렸을 때 광양에서 흔히 보았던 감들이‘광양 토종감’으로 분류되지 않았다는 점도 미분류된 광양 토종감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하게 만든다.
이들 토종감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소실된다면 함께 잃는 것들이 너무 많게 된다. 토종감에는 지역 고유의 문화가 있고, 공동의 기억들이 있다는 점에서 지역의 정체성 일부를 잃게 될 수 있다.
대대로 집안의 제사, 식생활에 사용되어 왔던 감 관련 전통 음식의 대가 끊길 수 있다. 특히 미래 세대를 위해 유전자원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유전자원은 새로운 품종 육성의 자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능성 성분의 존재 가능성이 있으며, 질병에 대처할 수 있는 성분의 잠재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토종감의 보존은 이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필요하지만 경제논리로 접근하면 쉽지가 않으므로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선, 미 분류된 토종감나무와 오래된 토종감나무를 찾아내어 분류하고, 스토리를 만들어 이용하는 등 문화자원화를 해야 한다.
의식 있는 종가, 고택에서는 원예종 감나무 대신 토종 감나무를 식재하고, 관리해야 한다. 관에서는 정자, 공원 등지에 몇 그루의 토종감나무라도 식재하고, 시민들이 스토리와 함께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광양의 토종감은 광양에서부터 스스로 지키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