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30> 거연정,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다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30> 거연정,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5.01.19 13:49
  • 호수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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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 박씨 봉촌 종손 박판기 씨

 


명문가란 어떤 집안일까?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를 쓴 순천 출신의 조용헌은 진선미(眞善美)에 부합되는 집안을 명문가라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판단하는 기준은‘고택(古宅)’이라고 단정하였다.


조용헌이 그렇게 단정한 이유는 이러하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동학농민운동, 일제 강점, 해방과 빨치산, 그리고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격동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격변기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했던 집안의 고택들은 거의 불타버렸다.

지금까지 고택을 유지하는 집안은 나름의 철학과 신념을 바탕으로 역사성과 도덕성을 겸비하고, 또 그것을 실천해온 인물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과연 광양에도 그러한 고택을 유지하고 있는 명문가가 있을까?

 


거연정, 1898년 건립되다

백운산 봉강면 봉계리 비봉산 자락에 거연정(居然亭)이 있다. 상산 박씨 봉촌파의 후손인 박희권이 1898년 독서처로 건립한 정자이다. 박희권의 절친이었던 매천 황현은 거연정이라는 정자 이름의 유래와 주변의 풍광을 담은‘거연정기(居然亭記)’를 작성해 주었으며, 현재 광양역사문화관에는 매천 친필의 거연정기가 전시되어 있다.

거연정의 주인공 박희권은 1906년 사립 광명학교를 설립 운영한 광양 최초의 근대 교육자였다. 1909년에는 광양서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광양 보통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손자 박종린과 종룡이 1938년 거연정을 새로이 중건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지금은 고손자 박판기(47세) 씨가 관리하고 있다.


박판기 씨는 상산 박씨 봉촌파의 종손이다. 그는 거연정을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해 지난 3년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집안 사람들의 힘을 모아 거연정의 지붕을 수리하고, 시청의 관계자들을 만나 거연정의 역사적 의미와 고조부 박희권이 주도한 광양의 교육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지난 년 말 드디어 결실을 거두었다. 2014년 12월 23일 광양시 향토문화유산 보호관리위원회는 거연정을‘광양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거연정과 그 주인공 박희권의 역사적 의미와 그것을 잘 보존해 온 후손들의 노력을 광양시가 인정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 감격한 그의 떨리는 목소리는 종손의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였다.

종손의 삶, 보람보다 의무감이 크다

거연정이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박판기 씨를 인터뷰하였다. 그는 집안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당숙 박병록(74세) 씨를 모시고 나왔다.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 기댈 수 있는 어른이라고 필자에게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인터뷰을 하는 동안 박병록 씨는 당질이자 종손인 판기 씨가 얘기하는 것을 거들었다. 70된 자식을 바라보는 90된 부모의 불안한 마음을 보는 듯했다.

박판기 씨는 현재 포스코 관련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회사와 문중 일로 눈코 뜰 새 없는 그에게 물었다.
“상산 박씨 봉촌파 종손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보람은 무엇인가요?”

“당연히 종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씀 드리면 보람보다 의무감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이때 옆에 계시던 당숙 박병록 씨가 종조카 자랑을 하셨다.“젊은 친구가 종손 역할을 정말 잘해요. 특히 최근에‘봉안당’을 지어서 조상들의 유골을 한 자리에 모신 일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상산 박씨 봉촌파는 6촌 모임인‘6비봉’을 결성하여 1년에 세 번 모임을 하고 있다. 핵가족화된 요즘 시대에 다른 집안에서는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모임이다. 6비봉 모임은 대소사 발생 시 팔을 걷어붙이고 서로 돕는다. 물론 십시일반으로 기꺼이 재정적인 부담도 한다. 그래서 지난 2014년 봄에는 제9대 봉강면장을 지냈던 종자 항렬의 할아버지“연강 박종룡 공적비’를 건립하고, 또 거연정 경내에 조모의 비를 세울 수 있었다.


박판기 씨는 이런 결실을 거둘 때 봉촌파 종손으로서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천시 지리 인화(天時地利人和)라 하였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인화(人和)가 될 수 있도록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는 게 저의 소임입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종부인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종손의 삶은 선택이 아니다. 운명이다. 특히 오늘날의 종손은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는 고독한 자리이지만 종손으로 태어난 죄로 모든 것을 감내한다. 하지만 종손의 가족은 처지가 다르다. 그래서 종손은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간직하고 산다.

박판기 씨도 아들과 딸이 어릴 때 함께 놀아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젊은 시절 주말 부부에다 문중 일까지 겹치니 주중은 물론 주말에도 아이들과 보낼 시간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아내이자 종부인 집사람에게는 정말 할 말이 없다.

“아내는 현재 순천에 있는 병원 약국에 근무합니다. 아이들 키우며 남편 뒷바라지 그리고 직장 생활까지 감당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틈틈이 문중 일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부담이 아주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늘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제 태생이 살갑게 대하거나 집안일을 도와주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집사람이 사는 게 별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필자가 종부를 직접 만나지 못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종손이 종부를 이야기할 때 아내 자랑하는 팔불출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종부가 자기 역할 이상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종손과 종부는 부창부수(夫唱婦隨)이자 부창부수(婦唱夫隨)의 사이였다.

거연정, 광양 시민의 품속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명문가의 종손은 힘들다. 그 보다 더 힘든 사람은 지역의 평범한 집안의 종손이다. 분명, 상산 박씨 봉촌파는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명문가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지방의 종손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지난 년 말 3년간 매달렸던 거연정의 광양시 향토문화유산 지정을 이루었으니, 상산 박씨 봉촌파 문중의 일은 당분간 쉬어도 되겠네요?”

“아직은 할 일이 남았습니다. 기회가 되면 순천대학교 박물관에 문중 유물과 자료를 제공하여  고조부에 관한 논문을 부탁드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훗날 광양에 박물관이 들어서면 광양시에 기증할 예정입니다. 제가 보관하고 있는 것보다 그게 더 안전하고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거연정과 그 주인공 박희권은 상산 박씨 문중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거연정은 광양시의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박희권은 구한말 교육 운동의 선구자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5년은 거연정과 박희권이 광양 시민의 사랑을 받는 원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은철 광양문화연구회(광양제철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