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야~~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걸~~♬♪”
단풍철이다. 요즘 붐비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쉬운 멜로디에 나이는 그냥 숫자에 불과하다는 가사가 흥겨운 트로트 리듬과 함께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윤택한 생활로 백세시대는 현실로 다가왔다. 벨기에의 한 연구기관은 2050년, 인간의 수명이 150년에 이를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늘어난 수명만큼이나 은퇴 후의 삶의 질이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는 요즈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정년을 60세 안팎으로 볼 때 정년 후 남은 세월이 거의 40년이다.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길일까? 오늘은 은퇴 이후 인생 2막을 화려하게 살고 있는 안영춘 선생으로부터 그 답 중의 하나를 찾고자 한다.
안영춘 선생은 광양시 진월면 출생이다. 태인초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이후 순천과 광양 인근에서 40년 7개월의 교직생활을 했다. 지난 2009년 2월 정년퇴직 후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바쁘게 살고 계신다.
선생은‘섬진해’라는 진월면 사회봉사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섬진해는 1983년 조직된 단체로 체육사업, 정화사업, 장학사업, 경로사업 등 4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체육사업으로는 진월면민체육대회를 추진하였다.
현재는 면에서 주관해서 열고 있으며 그만큼 규모가 커졌다. 정화사업으로는 시궁창이 흐르는‘진월정’주변을 초대 동창회장이던 박성옥 님과 함께 노력한 끝에 공원으로 변모시켰다.
이와 더불어 진월초등학교 동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모교찾기 운동’을 벌이면서 학교주변 환경을 눈에 띄게 바꾸었다. 세종대왕상, 스탠드, 어린이 헌장탑 등의 흔적이 지금도 학교 안에 남아있다.
섬진해가 벌이는 세 번째 사업에는 장학 사업이 있다. 진월초등학교는 1986년 개교 60주년 행사를 추진한 이후 동문활동이 전무한 상태였다. 선생은 2010년부터 총동문회를 부활하여 정착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동문회를 통해 진월초등학교 후배들에게 현장체험 학습비 지원이나 장학금 전달, 학교주변 정화사업을 해마다 꾸준히 해 오고 있다.
경로사업도 빼 놓을 수 없다. 1984년 이후부터 경로잔치를 비롯하여 해마다 연말이 되면 진월면 불우이웃돕기를 해 오고 있다. 쌀을 걷어주고, 독거노인을 지원하는 등 지금은 관에서 하고 있는 일을 30년 전부터 앞장서서 해 오고 있다.
호국의 성지‘진월’
선생은‘임진왜란호국선양회’단체 활동도 하고 있다. 선생이 퇴직하던 2009년에 지역 원로들의 부름을 받아 조직한 단체로 부회장 겸 총무를 맡고 있다. 진월은 예로부터 호국의 성지이다. 임진왜란 때 수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당시 배를 만들었던‘선소터’가 있다.
여수시에도 선소가 있지만 행정구역상 ‘선소’라는 지명을 가진 곳은 이 곳 진월이 유일하다. 왜적을 막고자 쌓은 백제산성인‘봉암산성’도 있고, 왜적이 쳐들어올 때 불을 피웠던 국사봉 봉수대도 있다.
민족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 시인의 시를 보관하여 이를 세상에 알린 서울대 교수‘정병욱 생가’역시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여러 정황들은 진월이 호국의 성지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임란호국선양회’에서는 선소유적을 찾고 복원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우리 단체의 노력이 인정을 받아 머잖아 선소터 표지석이 세워질 것입니다. 비문은 우리 단체의 박두규 회원이 써 두었고요. 또 현재 휴대폰 기지국이 들어서 있는 국사봉 봉수대 주변을 정비하고, 고증을 통해 복원하려는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윤동주 시인의 시가 보관된 ‘정병욱 생가터’에 윤동주 기념관 및 기념공원을 설립할 계획도 논의 중입니다. 이병근 회장을 비롯하여 최한수 고문, 정은숙ㆍ진수화ㆍ강석태 회원들과 힘닿는 데까지 노력할 생각입니다.”
모두가 놀란‘진월중 야구부’의 막강한 실력
한 사람이 한 가지의 봉사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데 일흔이 눈앞인 선생이 하는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최근에 선생이 가장 공을 들여 하고 있는 일은‘진월중학교 야구부 후원회장’으로서의 일이다. 진월중은 선생의 모교이다. 선생은 말한다.
“학교는 그 지역사회의 구심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경제논리로 학교를 없애자고 해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학교가 없으면 지역이 황폐해집니다. 제가 이 일을 하게 된 계기도 진월중, 진상중, 다압중, 옥곡중 이 네 곳이 한꺼번에 통폐합될 위기에 처한 상황 때문이었어요. 어떻게 학교를 살려볼까? 고민하던 중 우연찮게 김재구 대한실업야구협회 상임부회장을 만나게 된 겁니다.
진월중학교처럼 작은 학교에 야구부를 창단할 수 있느냐 물었더니 가능하다고 하는 거예요. 교장선생님을 면담하고 지역사회, 학부모, 중학교 동문회 측이 모여 몇 번에 걸쳐 난상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면학분위기를 훼손시킨다고 교사들이 먼저 반대를 하는 겁니다.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설득하는 한편 지원 가능한 단체나 개인의 모금도 함께 추진하였지요.”
수많은 어려움을 딛고 진월중 야구부는 올해 초인 1월 24일, 전국에서 모집한 24명의 야구부 학생들과 함께 창단을 할 수 있었다. 손 맞춰볼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4월에 열린「전라남도소년체육대회」에서 4전4승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다.
여세를 몰아 5월에 열린「제43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동상, 6월「제44회 전라남도지사기」 준우승,「제39회 전남종합체육대회」에서 우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채 1년이 되지 않은 기간에 이뤄낸 성과로는 믿어지지 않는, 눈부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부터 선생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고 한다.
“야구부가 이만큼 실적을 내기까지는 진기동 교장선생님의 확고한 소신, 교사단의 적극적인 협조, 코치진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우리가 고대하던 야구부육성학교배정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작년 이성웅 시장이 선수들 합숙소는 지어주었지만 코치진 급여나 숙소운영, 선수단 출전비 등의 모든 경비는 학교나 학부모가 부담하고 있습니다.
야구부 훈련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동문, 지역사회, 기업의 후원이 절실합니다. 진월면장님과 농협장님의 적극적인 지원, 또 진월청년회나 발전협의회에서 쌀이나 채소 등의 물품을 자발적으로 지원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인생 2막 역시‘봉사와 헌신’그리고 ‘고향사랑’
40년의 교직생활 중 진월에서만 13년을 근무하였다는 선생. 그의 공직 마지막도 진월초 월길분교에서 맞았다. 고향인 진월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선생. 고향을 위한다고 하여 아무나 봉사와 헌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선생은 앞으로도 더 하고 싶은 일이 많단다.
“풍요로운 진월을 가꾸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인재육성과 장학사업에 좀 더 힘을 기울이고요. 학교는 모름지기 아이들 뛰노는 소리,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나야‘살아 있는 학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 어른들의 말에 ‘되는 집안인지 안 되는 집안인지는 그 집의 문에 구멍 뚫린 걸 보고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통폐합이 논의되던 학교 명단에 이제 진월중은 없습니다. 학교를 살렸다는 데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속에서 살았고, 퇴직 후 5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아이들 속에서 행복하다는 선생! 열악한 야구부 현실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연금생활자이면서도 어떻게 하든 야구부 후원 장학금 천만 원을 만들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선생! 작은 체구 어느 곳에 그런 열정을 숨겨 두었을까?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선생에게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한 모양이다. 인생 2막을 멋지게 사시는 선생의 삶을 힘차게 응원해본다. 아자아자!!
양선례 광양문화연구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