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증오받아 마땅한 것에 대한 분노
[사람과 삶] 증오받아 마땅한 것에 대한 분노
  • 광양뉴스
  • 승인 2024.03.17 10:50
  • 호수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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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임<br>.광양ywca이사<br>.국방부/여성가족부 양성평교육진흥원 전문강사<br>
김양임
.광양ywca이사
.국방부/여성가족부 양성평교육진흥원 전문강사

우리는 미움 받아 마땅한 것에 대한 미움을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증오받아 마땅한 것에 대한 분노를 잊을 때 이 세상은 빛과 어둠, 선과 악, 위선과 진실이 구분되지 않고 어둠만이 우리를 짓누를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왔던 사건의 무료 변론을 자청했던 한 변호사가 1992년, 어떤 사건의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 이유서 가운데 나오는 대목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사건은 김00이라는 여대생이 아홉 살 때부터 자신을 성폭행해 온 의붓아버지를 남자친구와 함께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내가 꽤 오랫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유는 의붓딸이 의붓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보다 의붓아버지인 김영오(전 충주지청 사무과장)가 의붓딸에게 가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만행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영오의 가족이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한 진정서에서 김영오는 ‘자상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비길 데 없는 효자였고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모범적인 검찰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분노스러운 것은 그 사건을 다루는 검찰의 시각이었다. 

검찰의 주장에 따르면 김00은 ‘성폭행’을 당해 온 것이 아니라 ‘성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성노리개’로서의 신세가 명백히 밝혀져 있는데 검사는 ‘성관계’ 또는 ‘불륜 관계’라는 본말전도의 언어폭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김00의 존재는 9살부터 22살까지 하루 24시간 ‘김영오의 성노리개’라는 본질로 규정당해 왔는데 그런 모욕만으로도 모자라 고개를 숙인 채 힘들게 대답하고 있는 김00을 향해 검사는 또 한 번 일격을 가했다. “만일 김00이 남자친구를 진실로 사랑했다면 그의 장래를 아끼는 의미에서도 아버지로부터 더럽혀진 몸을 남자친구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이 상식 아닌가요?”

‘더럽혀진 몸’ 스스로도 그런 생각에 괴로워하는 김00에게 검사는 비수를 날린 것이다. 이런 기가 막힌 ‘정조 이데올로기’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어떤 멍에와 형벌로 덧씌워지는지..

이 사건은 그동안 금기시돼왔던 친족 성폭력의 엄청난 실상을 드러낸 사건이었으며 가장 사적인 공간이고 안식처로 여겨지던 가정 내에서 일어난 성폭행, 그래서 방치될 수밖에 없었고 또 지속될 수밖에 없는 친족성폭행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전년도(91년)에 일어난 김부남 씨 사건과 함께 우리나라 성폭력에 대한 인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고 또한 전국 규모의 세심하고 조직적인 활동은 성폭력피해자 보호와 성폭력 추방 운동의 장을 새롭게 마련한 점이 큰 의의가 있으며 1993년에 제정된 성폭력특별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렇게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언급하기 정말 불편한 사안들을 들춰내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의붓딸 13년간 성폭행한 50대 남성 구속기소”<한겨레 2023.11.10.>

“의붓딸에게 피임약 먹이고 친모 앞에서 성폭행한 계부”<서울신문 2023.11.13.>

“8살 딸 성폭행한 친아빠, 출소 뒤 또 몹쓸 짓... 딸 방에 몰카까지”<머니투데이 2024.01.03.>

“성폭행 수천 회 당한 딸에 목숨 끊은 엄마... 계부 파렴치, 판사 분노”<중앙일보 2024.02.01.>

 

흔히 아동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의 영향은 어렸을 때 일어났던 일이니까 잊혀지겠지...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렸을 때의 성폭력 충격은 아동이 자라나면서 인지적 영향이 △발달지체 및 학습능력 저하 △이해력 감소 및 판단력 저하 △자해 △등교 거부 △과도한 성취욕구 △알콜이나 약물 중독 △성적인 행동 △섭식장애나 자기 파괴적 행동 △폭력 공격 등의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또한 △PTSD를 포함한 외상 후 징후 및 정신장애 △자살에 대한 생각이나 행동 △분노와 수치심 △집중력 저하 △낮은 자존감 △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 △자기 비난 및 혼란 △신뢰감 부족 및 퇴행 △지역사회에서의 어려움 △가족에서의 어려움 및 고립 △성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부적절한 복종 △우유부단함 등 심리·정서적 영향이 사회적인 문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아동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지원 강화와 함께 어려서부터 타인에 대한 존중교육과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교육이 제도적이고 지속적이며 심도 있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