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이 흔히 쓰는 말 중에 ‘국민의 입장에서’, ‘국민 눈높이’같은 말들이 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도 최근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논란과 관련해서 ‘국민 눈높이’라는 표현을 썼다. 말 자체로 보면 당연한 얘기이다. 국민이 뽑아줬으니,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서 언행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실제로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입장’과 ‘국민 눈높이’는 말뿐인 것에 그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돈’의 문제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월 110만원의 주유비를 정액으로 지원받는다. 그리고 월 35만8000원의 차량유지비도 정액으로 지원받는다. 지출증빙도 내지 않고 정산도 하지 않는다. 주유비와 차량유지비를 지원하더라도 이렇게 매월 정액으로 지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실상 급여 성격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비과세 혜택까지 받는다.
노동자가 업무상 필요에 의해 자기차량을 사용하는 경우 회사로부터 차량운전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도 월 20만원까지만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국민들은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런데 국회의원의 경우에는 주유비와 차량유지비 명목으로 매월 145만8000원을 지원받으면서 세금도 내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국회의원이 공무수행 출장을 가면 철도, 항공, 차량 유류비를 따로 지원받는다. 별도로 ‘의원 공무수행 출장비’가 책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액수가 2023년에는 의원실당 연 평균 1141만4790원이었다.
이렇게 출장비까지 별도로 지원받으면서 주유비를 정액으로 매월 110만원이나 지원받는다는 것이 과연 ‘국민 눈높이’에 맞는 것일까? 그러면서 세금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일까? ‘국민 입장’에서 보면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일이다.
정치인들은 ‘혈세’나 ‘피 같은 세금’같은 단어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과연 자기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걸까? 이런 표현을 쓰려면 자신들부터 국민세금을 알뜰하고 투명하게 사용해야 하고, 예산 부정이나 예산 낭비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 정치인은 극히 드물다. 오히려 예산부정이나 예산 낭비를 비호하거나 은폐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는 작년 6월 23일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에서 사상 최초로 검찰 특수활동비 지출자료를 공개받았다. 3년 5개월간 행정소송을 해서 대법원에서 일부승소 판결을 확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자료를 공개받아 검증해보니 심각한 문제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현금으로 펑펑 사용하고 영수증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 현금수령증을 남긴 경우에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현금 1억5000 만원을 지급하면서 달랑 A4로 된 ‘영수증 및 집행내용확인서’ 1장만 받는 식이었다. 그 돈이 최종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특수활동비 집행 관련 자료를 불법으로 폐기하기까지 했다. 1달에 1번 또는 2달에 1번 폐기했다는 말이 법무부 장관 입에서 당당하게 나왔다. 기록물 폐기절차는 완전히 무시됐다. 아마도 검찰이 아니었다면, 당장 압수수색이 시작되고 관련자들이 구속되었을 사안이다. 그러나 검찰 특수활동비 관련 불법의혹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수사나 감사가 시작조차 되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돈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여당 대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국민 눈높이’에서 본다면 국민세금을 이렇게 마음대로 쓰고 자료까지 불법폐기한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물론 검찰만이 문제는 아니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크든 작든 예산과 관련된 위법ㆍ부당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다. 경상적으로 지출되는 경비에서도 부정부패, 예산낭비가 심각하고, 무분별하게 벌어지는 토건사업이나 민간보조금 등에도 문제가 심각하다. 가뜩이나 국가재정과 지방재정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인데, ‘국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드시 근절해야 할 행태들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각 정당들이 ‘국민 눈높이’를 들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선거 때에만 벌이는 ‘말 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으려면 주권자들이 따져 물어야 한다.
말로만 ‘국민 눈높이’를 얘기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정치인들의 특권을 어떻게 폐지할 것인지, 예산부정과 예산낭비는 어떻게 없앨 것인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그래야 선거를 하는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