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차 세계일본군 ‘위안부’ 기림식
광양평화나비 문명금 평화상, 주관
제78주년 광복절 재현 광양문화제와 제11차 세계일본군 ‘위안부’ 기림식이 광양평화나비문명금평화상(준) 주관으로 지난 15일 저녁 중마동 사랑병원 뒤 23호 광장에서 개최됐다.
광양만 촛불가수 강현수의 ‘봄날은 간다’와 ‘죽창가’ 열창으로 시작됐다.
이어진 광영농악단(단장 김규현)은 1945년 8월 17일 광양 서교에서 개최된 ‘광양군 해방 축하 광양군민대회’를 재현하는 공연으로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흥을 돋웠다.
특히 오숙희 MBC 전 무용단장과 제자들이 펼친 ‘독도는 우리땅 플래시몹’에서는 태극기와 한반도기를 양손에 들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 독도를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는 주제로 시민 30여명과 함께 ‘우리의 소원’을 가슴 벅찬 목소리로 합창해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김경섭 씨는 “위안부 기림일도 법정 기념일로 지정됐고 광복절은 가장 큰 경축일인데 광양시가 주도하는 행사가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김경섭 씨는 광복 이후 해방공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김완근·김학근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광양평화나비단 결성을 준비하고 있는 김양임 광양YWCA 이사는 “평화를 남기고 간 광양소녀, 문명금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할머니들의 삶과 그 이후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시민들에게 알리고 활동할 수 있는 전문가 양성과정에 힘을 기울이고 싶다”고 밝혔다.
1917년 광양군 진상면 구황리에서 태어난 문명금 할머니는 18세에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는 친절한 일본인을 따라갔다. 이후 중국 헤이룽장성 손오현(孙吴县)이라는 낯선 땅의 군인회관에서 ‘에이꼬’, ‘노부꼬’ 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하루에 20~30명의 일본군을 상대했다. 해방을 맞이한 1945년까지 10년 동안 열여덟의 소녀는 지옥을 경험했다.
여든이 돼서야 밟게 된 고국 땅에서 “정말로 내가 우리나라에 온 것이 맞냐”고 목 메여하던 문명금 할머니는 2000년 11월 3일 심근경색 등 합병증으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할머니의 묘비에는 “죽어서도 사과받으러 올거야”라고 쓰여있다.
한편 8월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故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성노예 범죄 피해 생존자 중 세계 최초로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2012년 지정됐다. 우리 정부도 2017년에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