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어린이란 말을 처음 쓴 게 평생 어린이들을 위하여 살다간 소파 방정환 선생이다. 이후 1924년에는 국제연맹에서‘아동권리헌장’을 채택했으며 1927년 우리나라는 어린이날을 정해,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두 가지 일로 하여 어린이란 단어만 생각하면 심하게 가슴앓이를 한다. 그 하나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이다.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을 보도한다. 축제에서 불꽃놀이 하듯이 포탄이 하늘을 가른다. 이어 집과 건물이 산산이 파괴되는 장면이 나오고 포탄에 죽거나 부상당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절규하는 장면이 비취진다. 한마디로 아비규환이다.
며칠 전 이스라엘은 유엔학교 피난처까지 가리지 않고 폭격해 전쟁에는 인정사정도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포탄에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안고 혼비백산하는 부모, 어린 시신을 묻는 망연자실한 팔레스타인 부모들, 전쟁의 참상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사진을 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런 가운데서도 와이티엔은 포격이 끝나자 공터로 나와 뛰노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전해줘 어른들의 가슴을 더 짠하게 했다. 그런 게 어린이들의 본디 모습이다.
그런 한편으로 어이없는 뉴스도 있다.
일상적일 때는 소풍이나 빼어난 경관을 구경하는 곳인 이스라엘의 남부 도시 ‘파라쉬 언덕’. 헌데 팔레스타인을 침공해 수 백 명을 죽이고 수 천 명을 부상시킨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을 구경하러 몰리고 있다는 외신 보도다. 이들은 쌍안경과 줌 렌즈를 이용해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가자 지구로 날아가 미사일을 퍼 붓는 장면들을 감상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팔레스타인의 미사일 공격으로 이스라엘인 또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많겠지만 팔레스타인의 비극에는 한참 못 미칠 것이며 폭력은 또 다른 폭력만 낳는다. 인간이 죽어 나가는 참상을 즐기듯이 지켜보는 그들의 몰지각한 행태가 보도된 후 양식 있는 사람들이 그 언덕을‘부끄러운 언덕’이라 부르는 걸 이스라엘은 알까.
정녕, 부끄러움이란 단어를 안다면 어른들의 오류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어린이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는 이 전쟁을 당장 멈춰야 한다.
물론 어린이, 사람들이 수난을 당하는 것은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곳곳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날마다 애꿎은 생명들이 특히 여성이나 어린이들이 생명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하며 가정이 없는 어린이에게는 알맞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균형 있는 영양을 취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받으며 공해 없는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어린이 헌장 중 일부이다.
그런데 하루에 10만 명, 특히 10살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다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 명 꼴이며 8억 5천여만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라면. 그동안 영화배우 안성기, 탈렌트 김혜자씨 등이 간간이 미디어를 통해 유네스코 등을 언급하며 기아 돕기 켐페인을 벌였지만 고백하자면 제대로 눈여겨보거나 새겨듣지 않았다. 그렇게 개인사에 일상에 젖어 살다 스위스 학자 장 지글러가 쓴‘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란 책을 읽으며 경악했다.
이 대명천지에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다니, 그렇다면 세계적으로 식량이 부족 한 건가.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구의 두 배는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 이 책은 문제의 핵심은 사회구조라고 적고 있다. 식량 자체는 풍부한 데 가난한 사람들은 식량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매년 수 천명의 사람이 굶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 책은 강대국과 다국적 기업, 세계를 지배하는 금융자본 등의 본질과 이들이 기아에 미치는 상관관계를 설파하고 국가보다 개인이 부유한 사회구조 문제로 인해 인간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전한다.
경제 불황이라고 난리지만 시중에 나가보라. 백화점은 여전히 성업 중이고 식당엔 손님들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가 넘쳐난다. 특히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4분의 1은 부유한 나라들의 소가 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만과 영양 과잉으로 다이어트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한편 그들이 먹는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소들이 옥수수를 먹어 치우고 그 한편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굶어죽고 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먹을 것을 섭취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데 그 먹을 게 없어 삭정이처럼 말라버린 다리, 퀭한 눈, 울음조차 낼 기력이 없어 그저 죽어가고 있는 어린이들. 그렇다면 기아 문제를 해결할 희망은 없는가. 저자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고 적고 있다.
서른 세살에 우리에게 ‘어린이’란 단어를 남겨주고 떠난 방정환 선생이 오늘날 굶어 죽어가고 있는 어린이들을 본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에필로그로 필자의 아들은 5년 전부터 아프리카 난민 돕기에 매달 용돈 5천원을 보태고 있다. 참 나, 아들보다 못한 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