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문화를 찾아서<9> - 미래로 열린 섬진강
우리지역문화를 찾아서<9> - 미래로 열린 섬진강
  • 김현주
  • 승인 2007.04.12 09:25
  • 호수 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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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간 공존하는 삶 제시 야윈 물줄기에서 광양만 바다로
 
‘너무 쉽게/사랑한다는 말을/ 뱉으면서 살아왔습니다./다시는/사랑하지 않으리라는 말도/ 너무 쉽게 던져버리곤 했습니다./사랑하는 일도/사랑하지 않는 일도/쉽지 않다는 것을/비로소 알겠습니다./그리하여 저 강물처럼/내게 오는 것들과/ 내게서 멀어지는 것들까지/ 마음 두지도 내치지도 않고/그냥 운명처럼 흐를 일입니다./’‘섬진강에서’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발원해 정읍시와 임실군·순창군·곡성군·구례군을 거쳐 우리지역 다압면과 하동군을 끼고 흘러흘러 하동군 금성면과 진월면 경계에서 광양만으로 유입되는 섬진강.

섬진강은 어느 길로 가도 좋다. 우리지역을 지나든, 하동을 지나든 남해바다로 흐르기 때문이다. 강이 베풀어 주는 복을 마음껏 누리며 강을 따라 내려가 보자. 어느 길로 가도 좋다.

모든 세상만물을 하느님이 창조했다는 입장에 서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볼 때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 어떤 사물도 신의 창작품이며 이미 존재해온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단지 인간은 지금껏 자신의 필요에 따른 발견과 이용만을 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우린 하나의 끝을 설정하고 또다른 시작을 준비한다. 시작이라는 개념 자체가 끝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분명 지금 여기에 있는 삶의 시간들이 결코 잘라내 분석할 수 없는, 분명 어제와 내일이 엄연히 맞물려 진행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과거 시간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잊어 버리며 새로움을 꿈꾸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고 해도, 어느 날 문득 모든 것이 무화되거나 놀라운 비약의 삶이 보장되는 것만은 아님에도 매양 새 날을 설계하고 새로운 미래를 염원해 보는가. 아마도 우선 그건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깊게 관련돼 있을 것이다. 쉽게 달라지지 않은 주변적 환경과 삶의 조건들 속에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전보다 나은 희망과 갈망들을 미래의 시간속에 투사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나 집단이 꿈꾸는 새로움이 현실화되기 위해선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점검이 필수적인 것. 또한 동시에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의지와 그동안 어떤 식으로든 오염되고 훼손된 양심의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얼마간 단식한 뱃속처럼 청청하고 향긋한 물기운이 느껴지는 섬진강가.
한반도 남쪽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았다는 맑고 투명한 이곳에서 재도약과 변신을 위한 물세례를 꿈꿔본다. 앙드레 말로가 ‘인간의 조건’속에서 말한 대로 부조리를 받아들이면서 살 수도 있고, 부조리 속에 머문 채로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뼛속 깊숙이 파고드는 강바람 속에서 또다른 차원의 삶의로의 탄생과 재생을 간절히 희원해 보는 것이다.
 
우리지역 섬진강은 그러기에 적당한 장소다. 우리지역을 지나는 곳엔 어떤 때는 높고 낮은 산구릉 사이에 키를 낮춰 여기저기 웅크려 있는 마을과 세상과 이어지는 푸른 강줄기, 그 사이를 화사하게 수놓은 매화들, 그리고 은빛 실모래가 눈물인 듯 반짝이는 강변에 서서 물의 생명력과 청정력에 기대어 보는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일찍이 노자가 갈파한대로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上善若水). 만물에 이익을 주고, 서로 다투지 않으며, 언제나 남들이 싫어하는 비천한 곳에 기꺼이 머물기를 자청하는 그대로 간직한 강물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우린 조금이나마 물의 정화력과 치유력의 혜택을 부여받을 수 있다.
모든 사악하고 부정적인 힘을 물리치고, 천지간에 고루 조화시키고 재생시킨다는 믿음 아래 발달된 ‘물법신앙’ 또는 ‘찬물신앙’에 의지해, 여전한 기세로 들끓는 온갖 무한증식의 욕망과 남을 희생해서라도  ‘나만 잘먹고 잘살겠다’는 이기심 등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내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는 소망을 ‘정수치성(淨水致誠)’에 담아보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지역 일부 섬진강은 지난 30여 년의 세월동안 졸속 진행된 근대화의 강풍에 휩쓸려 그 많던 모래는 업자들에게 채취돼 한동안 강 지형이 바뀌고 광양제철과 컨부두 등의 건설로 인해 다압면까지 바닷물이 올라와 생태계가 급변하고 있는 등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섬진강은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이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개발’과 ‘발전’의 반면거울로 남는 것은 당연한 일. 그새 잃어버린 소중한 삶의 풍경들과 자발적 가난들이라고나 할까. 자연과 인간이 서로 지배하거나 정복하려 들지 않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공존하는 모습들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일명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도 그 중에 하나다. 물론 농촌 공동체 해체에 따른 분노에 바탕으로 당대의 정치권력과 사회제도 등에 대한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실상 단순성과 검소함, 그리고 모든 형태의 생명에 대한 공경감이라는 공생공략의 도덕적 원칙이 있는 삶의 이상에 주목해 왔던 것.
 
‘푸른하늘/그 아래 청산/강이 있어 바라 보고 그 강언덕 산자락에/사람들이 모여/물 나고 빛 좋은 곳 터를 잡아/영차영차 집을 짓고/힘써 논과 밭을 만들고/철 따라 꽃 피고 지고 /씨뿌려 거두는 것같이/자식들을 늘려/동네를 이루며 살았으니/그게 몸과 마음 둘 땅이었더라’(섬진강 12)는 시구절이 그 증거다.
 
점차 문명의 하수구로 전락해가는 강과 바다, 거대한 매연의 연소장으로 변해가는 도시화의 물결속에서 ‘푸른 하늘’과 ‘청산’, ‘강언덕’과 ‘산자락’이 공존하고 화해하는 이상적 모델로서 섬진강 주변의 자연부락들을 주요적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 그리하여 자연과 지구를 무한장 사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만 생각하고, 기술문명을 인간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맹신적 신화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바로 그것들 때문에 인간과 더불어 파멸하고 말겠다는 대자연의 경고와 암시가 담겨 있다.  

우리지역 섬진강에서 얻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보다 많은 폭력과 착취, 그리고 인간의 내면적이고 외면적인 온갖 탐욕으로 인한 파괴로부터 해방, 어디로들 가고 있는 것조차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전부가 아니면 無’ 라는 강박들린  신념의 개인과 집단들 속에서 신성(神性)과 영성(靈性)을 잃어버린 현대의 공허함과 피페함을 뒤돌아보는 일.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로우면서도 유연한 물의 심상에 기대어, 인생의 섭리를 새삼 돌이켜 보고 자연과 세계와의 관계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지금 암울했던 한 시대의 역사와 부정을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청산하려는 작업은 억압이 없고, 자유와 문화가 충만한 사회로 가기 위한 진통이 시작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한 현실속에서 결코 방관자가 될 수 없는 우리들로선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한 스스로의 책임과 몫을 점검해야 하는 것. 그렇지 않고선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새로움을 기대할 수 없는 것. 모든 욕구의식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그 본래의 존재형상에 따르며 쉼없이 흘러가는 섬진강변에서 ‘보다 많은 소유’가 아니라 ‘보다 많은 존재’의 기쁨에 기초한 사회와 공동체를 꿈꾸어본다.
그새 우리가 잃어버린 작고 여린, 그러나 소중하고 귀한 그 무엇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