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고 3학년
마이클 샌델의 ‘완벽에 대한 반론(2016, 와이즈베리)’를 읽고
아이를 낳으러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앞에 나타난 건 한 명의 아이(배아)가 아닌 여러 명의 아이(배아)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싶지만 지금의 일이다.
자연 임신이 힘든 사람들이 인공적인 아기를 만들 때 실패가능성을 염두해 여러 개의 배아를 만드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착상 전에 유전자를 진단, 유전자적으로 뛰어난 아이를 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유전적으로 완벽한 아이를 만드는 시도가 있다면 우리는 반대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정치 철학자이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한권으로 열풍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줄기세포, 인간 복제, 유전자 강화 등의 대표적인 기술들을 비판하며 독자들에게 비판적 시각과 태도를 갖도록 요구한다.
[많은 이들이 일부 유전공학 기술들에 대해 모종의 불안감을 느끼지만 그런 불안감의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20쪽)]
지금의 생명공학 기술에서 유전적 강화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기억력 강화는 두뇌 노화를 방지하며 후대에도 유전된다는 큰 이점을 가진다. 유전적 강화가 허용된다면 거금을 들여 강화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돈이 없는 사람은 강화를 못하는 것이다. 이게 축적되면 사회계층을 아예 두 계급으로 나누어 버릴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직접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용인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는 ‘성과’가 가지는 힘이 막강하다. 많은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큰 성과를 얻기 원하고 자녀들에게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ADHD 치료제를 치료의 목적이 아닌 정상적인 아이들의 집중력을 높이는 용도로 비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다른 유전자 강화라는 요소와 관련지어 생각해보자. 유전자 강화 시술은 안 되지만 약물 사용은 옳을까? 유전자 강화가 가지는 윤리적 문제는 걱정이지만 아이들의 인권보다 성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는 괜찮은 걸까? 유전적 강화를 단순히 생명공학이라는 틀 안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조금 더 넓은 틀에서 능동적이고 융통성 있게 생각해야할 것이다.
[오늘날 자주 목격되는 과잉 양육은 삶을 선물로 바라보는 관점을 놓친 채 과도하게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심리를 보여주는 징후이다.(83쪽)]
과잉 양육(간섭)에 의해 도입된 유전자 강화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창조주 즉,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것이며 이것은 과거의 논란의 대상이었던 우생학의 기본적인 목표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강제성 없이 자율적인 의지를 통하면 괜찮을까?
이 책은 독자 스스로 성찰하고 미래의 과학기술의 사용자로써의 태도를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발전해가는 기술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성찰하게 한다. 책은 역시 우리를 사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