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 기념관 사역 최선 … 많은 기도와 관심 바란다”
“100주년 기념관 사역 최선 … 많은 기도와 관심 바란다”
  • 김양환
  • 승인 2017.03.31 19:53
  • 호수 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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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장로, 광양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이사장 취임

광양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회 이사장에 김광호 중동교회 장로가 취임했다.

지난달 30일 광양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9주년 기념 및 이사장 이취임식에는 인근 교회 목사, 장로 등 교회 관계자와 정현복 시장, 강정일 도의원이 참석해 축하했다. 백관찬 전 이사장에게는 공로패가 증정됐고, 100주년 기념관 운영에 공이 큰 황재우 광양기업 회장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김광호 취임 이사장은 “부족한 저에게 이사장이라는 무거운 직분을 맡겨주신 이사회와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여러분의 유지를 받들어 성심성의를 다해 100주년 기념관의 사역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기도와 협력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광양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관은 2002년 광양지역에 기여한 기독교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발굴하고 광양시 관광사업과 연계해 기독교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2003년 법인 설립 허가를 받아 진상면 황죽리에 부지를 마련했다. 국도비 등 40억원의 예산으로 지하1층, 지상3층의 건물에 광양기독교 역사관과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강당, 회의실, 숙소 등이 있다.

진상면 황죽리 웅동(곰골)에서 시작한 광양 기독교 역사는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특이하다. 1895년 일본 미우라 공사를 추종하던 일본 낭인들은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천항에 이르렀다. 하지만 국모의 죽음으로 슬픔에 쌓여있던 조선에서 의기가 분출되어 조선 청년 한태원은 국모를 시해한 자객을 인천 앞바다까지 뒤쫓아서 살해하고 웅동마을에 피신하게 된다. 웅동 마을에 낯선 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들은 일본은 광주 검사국 관리를 파견해 정탐케 한다. 체포에 실패한 검사국 관리는 지역민인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 등을 만나 이들이 노름으로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고 예수교를 소개한다.

그 후 3인은 광주까지 걸어가 오웬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배우고 돌아와 곰골 마을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광양 기독교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웅동마을 19세대 전부가 예수를 믿을 정도로 교인 수가 증가함에 따라 예배 처소가 협소하고 골이 너무 깊어 박희원이 살고있는 신황리로 옮겨 1905년 11월 3일 한옥 8칸의 목조 건물을 신축  예배당 신황교회를 설립하고 , 민족교육을 위한 광신학원을 설립하여 기독교 교육에 치중했다. 당시 웅동, 대방 ,섬거 등에서 찾아오는 교인들로 주일에는 500~60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선교사가 베푸는 세례식에 120여명이 세례를 받는 등 전남 및 경남 하동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선교기지가 되었고 이후 1908년에는 대방교회, 진상교회, 웅동교회가 분립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미국 남장로교에서는 1908년 광양읍에 읍교회를 설립했다.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웅동지역의 역사적 상징성을 고려하여 웅동(곰골) 마을에 광양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 기독교 순교자기념관에 광양지역 순교자 명예의 전당을 신설하고, 순교자의 유품, 유물 등을 순교자 후손들에게 기증을 받은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연구에 자랑으로 자리 매김 되었고, 광양이 기독교 성지관광순례지로 각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