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신 광양문화원 이사(옥곡면)
조선시대 서원은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고 선현들의 제향을 위하여 조선중기 이후에 사림에 의하여 향촌에 설립한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사(享祀)를 올린 곳이다. 또한 서원이란 제향과 강학기능을 가진 점에서 관학과의 차이가 없었지만 제향의 대상인 공자와 그의 제자인 성현이 아닌 선현이며 설립 주체가 정부가 아닌 지방 사림이고 설립의 배경이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1541년(중종 36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신재 주세붕이 이듬해에 이곳 순흥 출신 유학의 종주인 회헌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별세한지 2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회헌을 흠모함이 남달리 그 뜻이 깊었던 터라 사묘(祀廟)를 설립하고 배향하였다.
그 다음해(1543년)에는 유교생들의 강학을 겸비한 백운동 서원을 건립한 것이 서원의 그 효시(嚆矢)이며 그 1년 후 1544년에는 안축과 안보를 추가로 좌우에 배향(拜享)하였다.
1546년(명종 1년)경상도 관찰사 안현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으며 그는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여 서원 향사에서부터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 및 관리 노비와 원속(院屬)의 관리 등 서원의 운영ㆍ유지에 제반 대책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548년 단양군수에서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백운동 서원을 공인화 하고자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당시 심통원 관찰사에게 유학을 공부해 선현의 도를 잇도록 해야 한다고 고(告) 하였으니 그 뜻을 가상히 여겨 그는 조정에 아뢰었고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에게 명하여 서원의 편액을 소수라 이름했다.
이후 1550년 2월 명종이 직접 쓴 네 글자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려 이것이 조정에 의하여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서원이 공인된 사립 교육기관의 위상을 확보함으로써 그 뒤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서원은 단순한 향사와 교육기능 수행만이 아니라 지방 사림들의 정치 사회활동의 중심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내재하고 있는 선상에서 볼 때 소수서원의 설립은 주목할 만한 가치를 인정해 주었다. 이로써 소수서원은 선현 배향과 수많은 명현거유 배출은 물론 학문 탐구의 소중한 자료를 소장 지방교육의 한 부분을 차지함으로써 향촌사림의 정치와 사회적으로 활동이 원활히 전개되었으며 사학의 중심으로 자리 매김하는 가운데 1633년(인조1)에 주세붕도 본 서원에 추가배향 하였다.
당시 유학을 삶의 척도로 여기는 사림들의 입장에서는 선현 배향과 강학기능인 서원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당면과제로 여겨져 이 곳 저 곳에서 서원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명종 때 벌써 29개소, 선조 때에는 124개소가 생겨나는가 하면 숙종 때에는 1개도에 80-90개소씩이나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일부 서원에서는 양반들의 지나친 행동으로 적지 않은 폐단이 속출하게 되자 1864년(고종원년)에는 서원 사설을 금지하고 고종 2년에 이르러서는 봉향인물이 문묘종사 및 절충대의가 뛰어난 자가 아닌 서원은 철폐령을 내려 전국 670여개나 되는 것을 훼철하여 고종 8년에는 소수서원을 비롯 47개의 서원만이 남아있게 하였다.
그러나 훼철된 서원 가운데 복고적인 선비들에 의하여 대다수가 다시 건립되어 현재 전국에는 약 900여개소가 있다.
서원이 설립된 곳은 주로 존경받을 만한 선현의 일정한 연고지나 고향을 중심으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은거해 수양하며 독서하기에 좋은 곳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하여 산수가 뛰어난 곳이다.
서원은 향교와 달리 마을과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환경의 유혹에서 벗어나 선현의 배향과 동시 학문에 정진할 곳으로 교육적 성질이 높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물이 흐르고 산이 있어 풍월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자연에 서원을 건립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 선현을 뫼시고 제향을 올리는 성리학의 산실이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광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