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對話)의 기술
대화(對話)의 기술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3 16:33
  • 호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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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렬 / 마하나임 커뮤니티 교회
대화의 일차적인 목적은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나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의사전달의 과정에도 철저하게 상대를 존중하거나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렇지 않고 말을 끊는다거나 일방적인 내 주장만 펼치는 것은 바른 대화라고 할 수 없다. 대화(對話)의 대(對)라는 글자는 ‘(마주)대한다’라는 의미와 함께 ‘대답하다’라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화에 있어서는 내가 먼저 말하는 것보다 상대의 이야기에 대답하거나 듣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라는 것을 단어 자체에 내포하고 있다.

기도(祈禱)의 정의를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과의 대화(對話)’라고 표현한다.

일방적으로 우리가 요구하고 소원하는 것을 빌거나 고하는 것은 바른 기도라고 정의하지 않고 그것은 주문(呪文)에 가깝다고 말한다. 바른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기도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방적인 선포나 탄원은 바른 대화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경우는 대부분 싸움에 가깝다. 그래서 그것은 대화라기보다 위협(威脅), 협박(脅迫), 폭언(暴言)이라고까지 한다. 이런 대화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일방적이어서 그 대화의 끝은 결국 폭력이나 상처로 남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화(對話)의 화(話)라는 글자의 뜻을 한자로 보면 음(音)을 나타내는 舌(설-입에서 혀를 내민 모양)과 재미있게 말한다(言)는 뜻이 합(合)하여 ‘말하다’라는 의미를 뜻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화(話)라는 말의 의미는 그냥 ‘말씀’이나 ‘이야기’의 의미 외에 ‘좋은 말’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화라는 말의 의미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좋은 말로 대답하며 서로 재미있게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정의 할 수 있겠다.

대화(對話)의 이차적인 목적은 동일한 생각에 대해서는 함께 즐거워하고 서로 의견이 다를 때는 서로 조율(調律)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의견이 다른 이때에 바로 대화의 기술(技術)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의견을 잘 조율했을 때 협상(協商)이 타결되었다거나 협의(協議)가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협상(協商)이라는 말속에 ‘거래하다’라는 단어가 포함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요즘 과거 우리 조상들의 상단들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드라마에서 나온다. 거상(巨商)들을 보면 그들이 거래할 때 큰 이문을 위해서는 때로 나의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본다.

이견(異見)에 대한 조율은 내가 가진 것을 하나도 잃지 않고, 손해 보지 않고, 상대방에게만 손해와 양보를 강요해서는 협상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 조금씩의 손해를 감수하고 양보하는 미덕이 따라야만 공존공영(共存共榮)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993년 요나라의 제1차 고려 침공 때에 소손녕(蕭孫寧)과 담판을 벌인 서희(徐熙, 942~998년)에 대해 역사적인 평가가 분분하지만 그들이 나눈 대화가 어떤지 사뭇 궁금해진다. 이 사건은 서희가 강동6주를 얻었다기 보다 외교적 협상을 통해서 요의 침공을 막았다는데 그 의의가 더 크다 하겠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 당연히 고려는 요나라를 천하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손해 없이 이루어지는 협상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요즘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 극과 극으로 서로의 의견이 대립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한미 FTA협상, 북핵문제, 국군통수권환수문제 등 큰 국가적인 문제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 지역사회, 그리고 일반 공동체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이견이 극과 극으로 치닫는 경우를 자주 본다. 얼마 전 우리 지역과 묘도 사이의 다리를 놓는 문제로 한참 의견이 분분했던 일도 있었다. 가장 많게는 노사 간의 문제도 그렇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대화의 창과 토론의 장이 마련되는 것을 보았으나 오히려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고, 서로를 이해하기 보다 자기주장만 하다가 결국 극단으로 치닫고 폭력으로 결말이 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안타까운 일이다. 가정에서 자녀와 대화한다고 시작했다가 결국 부자지간에 싸움만 났다는 얘기가 노사간에도 별반 다르지 않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우리 문화에서 대화의 기술이 아직은 미숙하지 않나 생각된다.

이제는 일방적인 선포에서 차츰 함께 마주하고 듣기를 먼저하며, 즐거운 이야기를 주고 받고 때론 손해를 감수하며 이견을 함께 조율해가는 그런 대화의 기술을 일부러라도 연습하고 실천해 간다면 가끔씩 거리에 나부끼는 깃발이랑 플래카드를 조금이라도 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입력 : 2006년 08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