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잘 팔리는 ‘베스트 셀러’를 분석해 보면 당시 대중들의 기호, 관심사 및 문화지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준거가 되기도 한다. 대중들이 선호하는 현상 속에는 그럴만한 사회적 징후와도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제5공화국 시절 정부가 들어서면서 내걸은 캐치프레이즈는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정의사회’는 당연히 공정성을 담보할진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망하는 사회인가. 제5공화국 시절에 ‘정의사회’를 내걸은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통성이 약한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위무하고 소통을 증대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정의사회’를 슬로건으로 내걸은 이유를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 국민이라면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진리’ ‘정의’ ‘공정’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이름 값을 못하는 경우를 보면 쓸쓸해지는 마음이다.
이름 값을 못하는 언어를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언어의 운용현상의 폐해로, 본래 언어에 담긴 의미가 변질되어 언어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물론 언어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구축해 놓은 덕목이나 약속이 공허해져 결국 인간사회의 불신감을 심화시키고 신뢰감을 무너뜨릴 뿐이다. 신뢰감이 무너진 사회의 말로(末路)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
이명박 정부 들어 ‘공정한 사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다. 하지만 이 정부 들어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유명환 장관의 딸의 특채 문제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국민들의 반응이 싸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 장관 딸의 특채 문제로 호들갑 떠는 일부 언론의 반응이 오히려 새삼스럽다.
진즉부터 지도층의 일부에서는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면서 오늘에 이르지 않았는지 되씹어 볼 일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공정한 사회’에 불감증에 젖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건 아직도 기득권의 유지 및 세습에 혈안이 되고, 또 여전히 이 파도를 어떻게 넘기면 무관심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불감증에 걸린 사람들이 사회의 구석에 독버섯처럼 잔존하고, 동시에 그런 불감증으로 인해 이와 유사한 일들이 앞으로도 반복됨으로써 공정사회의 룰을 깨뜨려질 것이라고 여전히 불안해하는 국민들의 심정임을 사회 지도층이 속 깊게 헤아려 납득할 만한 제도적 조치를 취하는 일이다.
현대판 ‘음서’(蔭敍)의 관행이 사라져 일반 국민들과의 위화감이 해소될 수 있어야 한다. 일련의 사건은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암적인 요소로 자리할 뿐만 아니라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후진적 행태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회 일각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를 주창하며 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를 주창한 것도 엊그제 같은데, 속으로는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며 기득권의 유지와 사욕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는 국민들의 가슴은 피멍이 든다.
어째튼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사회’에 대한 논의는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지역사회도 이러한 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지역사회로 눈길을 돌려 보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역사회는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기 위해 각 분야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점검해 보았으면 싶다. 제도적인 뒷받침이 부족해서 시민들 중에서 ‘빽 없고 돈 없어’ 억울해 하거나 실제로 억울한 일을 당한 시민들은 없는지 주변을 살펴볼 일이다.
지역의 유지와 지도층들이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선거를 치를 때의 초심이 자꾸 흔들리고 이제 시민 위에 군림하려는 유혹이 마음 한 켠에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닌지? 진정 시민들로부터 마음속에서 우러난 존경을 받고 있는지? 각자 마음속의 거울을 들이대면서 성찰하는 시간들로 채워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가오는 추석 명절은 더 없이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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