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과 긍지로 농사지어요”
진월에서 다압으로 향하는 길. 대리마을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갑자기 반듯한 도로가 나타난다. 구불구불했던 도로가 처음으로 펴지며 좌우엔 비닐하우스가 가득한 그곳. 진월면의 마지막 마을이자 첫 마을인 가길 마을이 있는 곳이다. 40여 호의 조그만 마을. ‘갈기리ㆍ갈거리’라고도 불렸던 이 마을은 진상면과 다압면 경계에 있는 매봉에서 남하한 산등성이가 마을을 감싸고 위쪽에서 갈라져 산세가 뻗음에 따라 ‘갈라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가길 마을 앞 농지엔 온통 비닐하우스가 빼곡하다. 그곳에선 양상추와 각종 엽채류, 수박 등이 쉼 없이 재배되고 출하된다.
이른 오전, 일손에 방해될까 조심스런 마음으로 이종생 씨의 비닐하우스를 찾았다. 언제부터 작업을 시작했는지 벌써 기다란 줄의 막바지에서 부부가 다정한 모습으로 근대 따기에 한창이다. 아직은 이른 출하지만 갑자기 주문이 들어와 이를 맞춰주기 위해 작업 중이란다. 한 잎 한 잎 근대 잎을 따는 손길은 멈춤이 없이, 그러나 밝은 웃음으로 반긴다. 힘든 노동에도 농사일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절로 묻어난다.
이종생 씨가 농사를 시작한 것은 13년 전. 대구에 있는 친척집에서 일을 돕다, 어느 날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집은 물론 마을 주민들이 비닐하우스를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동안 농사에 관심이 없던 그였기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비닐하우스 농사가 이날은 새삼스럽게 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종생 씨는 집에 눌러 앉았고 양상추 재배를 시작했다. 아무 연장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한 첫 농사, 4동을 재배해 당시엔 큰돈인 7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그동안 해왔던 어떤 일보다 큰 성공이었다. 또 일을 하다 보니 재미도 났다. 이후 그는 ‘이것이 내 천직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지금껏 한눈팔지 않고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다.
이렇게 농사를 시작한 이종생 씨가 친환경 엽채류 재배로 또 한 번 변화를 시도한 것은 6년 전. 우연한 기회에 순천 농산물검사소를 가게 됐고, 그곳에서 지역선배로부터 친환경 농법을 권유 받으면서 부터다. 하지만 처음엔 어려움도 많았다. 친환경 인증을 위해 영농일지 등 서류를 요구하기에 나름대로 만들어 갔지만 몇 번을 퇴짜를 맞았다. 먼저 친환경 농업을 실천하고 있는 선배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지만 쉽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결국 포기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와 학교를 함께 다녔던 하동지역의 친구들이 친환경농업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됐고 그들의 도움을 통해 비로소 친환경 농업에 입문하게 됐다. 한번 통하니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후 시와 원협에서 실시하는 친환경 교육에 열심히 참여하고 초기엔 이웃마을 중도의 작목반에도 참여하면서 친환경 농법을 익혔다.
이 씨는 “지금생각하면 그게 뭐라고, 열심히 하고자 해도 생소한 일들에 적응 못했던 지난 일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다”며 “지역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기술을 나눴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 못해 야속하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이 씨는 현재 20여 가지 이상의 엽채류를 재배해 학교급식 납품업체에 식자재로 납품한다. 또 광양뿐만 아니라 순천과 경상도 지역의 마트 7~8곳에 까지 대주고 있다. 그래서 쉴 틈이 없이 언제나 바쁘다. 그의 5천여 평의 비닐하우스에선 끊임없이 새로운 엽채류가 심어지고 출하된다. 거래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고, 특히나 아이들의 급식에 문제가 생기게 할 순 없기 때문이다. 이 씨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한 잎 한 잎 수확을 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며 “하루라도 쉬려면 열흘 전부터 미리 한두 시간씩 당겨놔야 쉴 수 있다”고 하소연 한다. 하지만 이렇게 바쁜 것도 그에겐 재미다. 웬만한 회사원 보다 훨씬 나은 수입이 따르기 때문이다. 또 기술과 장비가 발달해 예전처럼 많이 힘든 것도 아니고 친환경으로 재배한 먹거리로 밥상을 차려 건강까지 얻고 있다.
그는 “이녘 새끼들 먹일 채소에 약을 칠 수 있겠습니까. 요즘 농약은 침투이행성으로 잎에 묻으면 뿌리까지 내려간다”며 “그걸 사람이 먹는다고 생각해 보면 끔찍한 일이다”고 강조한다. 또 “주변에 풀이 많으면 오히려 벌레도 많이 없어진다. 밖에 먹을 게 많은데 왜 하우스 들어오겠느냐”며 “제초작업이 힘들더라도 제초제 사용은 자제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씨가 특히나 자부심을 갖는 것은 그가 재배하는 친환경 엽채류를 주변사람들이 먹어보고 맛있다고 인정해 주는 것. 그리고 초등학교 1ㆍ2학년인 애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가 키운 것은 한 번도 농약을 친 것을 먹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지역에선 친환경으로 엽채류를 대량 재배하는 곳은 이종생 씨가 유일하다. 그래서 그의 책임감도 크다. 학생들이 그의 고객이기 때문이다.
비록 한 잎 한 잎 일일이 손으로 따내려니 힘든 것보단 지겨움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학교가 없어지는 그날까지 꾸준히 납품할 거래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복’ 이라 생각한다. “거름 중에서 주인 발걸음이 제일 좋은 거름”이라며 하루에도 몇 번씩 비닐하우스에 들려 정성으로 각종 채소를 관리 하고 있는 이종생 씨. 그의 곁에서 “비록 몸은 힘들어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떳떳하고 보람 있다. 내가 재배한 상품이 어디다 내놔도 자신 있으니 보람과 긍지를 갖고 농사를 짓고 있다”며 웃음으로 화답하는 그의 부인 김숙희 씨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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