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위해 남다른 일 해보고 싶어
고향 위해 남다른 일 해보고 싶어
  • 이성훈
  • 승인 2009.07.29 20:04
  • 호수 3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양읍 출신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장


광양군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 아쉬워…후학 양성하고 싶어

얼마 전 별세한 고 이용학 전 광양교육장의 동생인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장. 37년생이니 올해 일흔 셋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한국 음악 발전을 위해 두 팔을 걷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회장은 음악교육학자이면서 지휘자,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광양출신인 이 회장은 현 광양실고 전신인 광양농고 2회 졸업생으로 서울대 음대 작곡과,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 음악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덕택에 경력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61년부터 순천사범학교, 여수여고, 광주일고에서 교편을 잡은 이 회장은 이후 66년 목포교대 전임강사, 조교 부교수를 거쳐 교수에 오른다. 74년부터 서울대학교음악대학 강사를 시작으로 70세가 된 해까지 교육부 교육과정심의위원을 역임했다. 또 서울세종문화회관 이사를 역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78년도부터 광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를 10년간 맡은 적도 있다. 이 회장은 “10년 동안 광주시향에서 활동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고 재밌는 추억도 많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광주시향 재직 당시 단원들에게 매년 시험을 치러 점수 이하인 단원들은 월급을 깎는 등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처음에는 단원들의 반발도 많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회장의 의중을 깨달았던 단원들은 매일 피나는 연습을 통해 실력을 나날이 쌓아갈 수 있었다. 이 회장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광주시향 단원들이 내가 재임하고 있었을 동안 단 한명도 바뀌지 않은 이유가 경쟁을 통한 실력 을 쌓기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그의 음악 열정은 세월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난 83년 전라남도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86년에는 금호예술상, 황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2002년 전남대 정년퇴직 후 이 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어릴 적 고향에서 학교 다니던 시절도 생생하다고 기억했다. 음악가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고 한다. 광양중학교에 입학한 후 학교 밴드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양중 밴드부는 형님인 이용학 교장이 다른 학교로 전근하면서 해체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이 회장은 농고로 진학하는데도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순천 쪽으로 진학을 하고 싶었던 그는 형님과 가족들의 설득으로 광양농고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형님이 우리 고장 발전을 위해 ‘너부터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며 끝까지 설득해 농고로 진학하게 됐다”고 술회했다.

광양농고 2회 졸업생인 이 회장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음악에 심취해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면서 “당시 농고를 진학하지 않았으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웃었다. 그는 특히 광양읍교회를 다니며 음악 공부에 매진했다. 이 회장은 “당시 음악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항상 교회에서 홀로 음악 공부를 했었다”고 말했다.

아련한 추억과는 달리 고향에 대해 아쉬웠던 부분도 있다. 이 회장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쯤 고향에 광양음악원 설립을 추진했었다. 광양음악원은 저렴한 가격으로 우수한 음악인재들을 광양에 데려와 음악 전문 교육을 시키는 곳으로 현재 대구에 있는 영재예술교육원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 회장은 “구체적인 계획과 비전도 제시되었는데 끝내 무산됐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당시 시장님과 의회에서도 광양음악원 설립에 관심이 많았다”며 “거의 설립 분위기에 왔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광양음악원은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학원 단체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던 것이다. 이 회장은 “당시 광양음악원이 설립됐으면 수많은 음악 인재를 육성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고 생각한다”면서 “문화 인프라 구축에도 한몫 했을 것이다”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광양군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도 이 회장으로서는 뼈저리게 서운한 부분이다. 95년 광양군과 동광양시가 통합하면서 서정주 작사, 김동진 작곡의 시민의 노래가 광양시가로 채택됐다. 광양군가를 작곡한 이 회장은 “이은상 선생이 작사한 광양군가가 지역 정서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데도 사라져 버린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시민의 노래는 백운산, 섬진강 등 우리지역 특정 단어만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하다”면서 “이은상 선생은 광양에서도 산 적이 있었고 두 곡을 비교해보면 어떤 곡이 광양시를 대표하는 노래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고향에 올 때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서 감탄하고 있다”는 이 회장은 후학 양성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덕례초 교가를 작곡한 그는 특히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이나 진로를 결정하는 학생들을 상담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음악은 어떤 선생을 만나느냐에 따라 실력이 확연히 다르다”며 “학생들을 만나 그들의 능력을 판단해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또 “항상 고향 후배들을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다”며 “고향에서 원하면 언제든지 달려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