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국 향우 (제일전기 대표이사)
향우코너<2>
지난 5일, 옛 골약면 마흘이 고향인 김형국(49·제일전기(주) 대표이사)향우를 만나기 위해 광주로 향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호남지역 대부분에 포설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광양에서 광주까지 가는 데 있어 별 문제가 있겠냐 싶어 승용차로 단숨에 광주 용봉동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와의 만남은 처음이었지만 사무실을 방문하고 진솔한 얘기를 들으면서 그래서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언가 달라도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사무실 벽에는 고향마을 전경이 담긴 대형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꿈을 꿔도 고향에 대한 꿈을 꿉니다. 사무치는 고향생각에 고향 마을이 담긴 사진을 70만원에 구입했으니까요.”
눈 내리는 광주 하늘을 뒤로하고 어릴적 삶이 순간 오버랩된다. 얇은 회초리가 활처럼 휘어지며 바람을 가른다.
종아리에 회초리가 감겨들자 눈물을 터뜨리는 어린소년. 자식을 금이야 옥이야 키우는 지금이야 희미하게 잊혀져 가는 풍경이지만, 공들여 짜던 비단을 한칼에 끊어버리며 맹가의 나태함을 질타하던 맹모(孟母)가 바로 우리네 어머니였던 것을.
김형국 향우(49) 성황초등학교(27회)와 골약중학교(2회)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고향에서 고교진학을 못하고 광주로 향했다.
당시 광주에는 당숙인 김영규 옹(작고)께서전기공사에 관련된 자재를 공급하는 광인상사를 운영해 그곳에 발을 디디면서 인연이 돼 오늘의 그를 있게했다.
그가 이룬 지금의 제일전기(주)는 50억원의 매출을 상회하지만 저간의 사정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 85년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순천에서 첫 사업체를 벌였지만 결국 가진 것을 몽땅 잃고 무일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 후 2년뒤인 87년에도 다시 순천에서 재기를 노렸지만 허사였다. 어릴적 당숙에게서 배운 경영노하우는 정작 본인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엎친데 덮진다고 이듬해 인 88년 1월1일에는 처가인 고흥을 가다가 승용차끼리 정면 충돌을 당해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기도 했다.
그는 이후 89년 호구지책으로 전기공사와 관련된 회사에 평직원으로 취직을 했다. 당시 다니던 회사는 급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어려움을 가중시켰지만 3년만 버티다가 안되면 한창 개발 일로를 걷고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자는 마음이었다.
그러기를 3년 후인 91년. 광주 수기동에 남의 창고를 빌려 한켠에 4평 크기의 사무실을 내고 또다시 재기에 나섰다. 회사 간판도 없었다.
그리고 명함만 만들었다. 당시 그의 재기를 불태운 것은 율산그룹 신선호에 대한 일대기. ‘서울은 몇시인가’ 라는 이 책은 율산에 근무했던 한 간부가 2년만에 11개 계열사를 거느린 율산 일대기를 그린 것인데 그는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먼저 그동안 쌓은 인맥들을 찾아 다녔다. 당시 전북지역 업체들과 친분이 많아 안내장을 보내자 주문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재 창고 하나없던 그는 변압기나 전선 등을 길가에 쌓아 두고 주문이 올때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 물건을 차량에 실어 납품하기를 5년 여.이제 사업체는 생애 처음으로 웬만한 궤도에 올랐다.
그러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봤었기에 주위 친한 사람들에게 보증을 서 준 것이 화근이 돼 한해 보증으로 10억원을 날리기도 했다.
“내가 어려움을 겪어 봤기에 보증으로 날린 돈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더 힘들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간의 어려움을 뒤로 하고 재광주 광양시향우회에서 고향사람들과 교분을 두텁게 하고 있다. 그의 경험과 성과를 고향 선.후배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에요. 광양신문은 고향 지킴이로서 제 역할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김 사장의 눈빛에서 다부진 각오와 희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작권자 © 광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