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광양 빨치산 울타리
[문화칼럼] 광양 빨치산 울타리
  • 광양뉴스
  • 승인 2024.07.08 10:06
  • 호수 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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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북구(사)한국농어촌관광학회 수석 부학회장
허북구(사)한국농어촌관광학회 수석 부학회장

고령자의 사망 증가로 1950년 전후의 광양 역사도 많은 부분이 잊혀지고 있다. 

1950년 전후의 광양 역사는 파란만장(波瀾萬丈) 그 자체이다. 그 당시의 역사는 슬프고 아픈 역사였고, 그것은 오랫동안 과거에 머물게 했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들려준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1950년대 전후의 아픈 이야기였다. 아픈 과거의 이야기는 대부분 일부러 꺼낸 것들이 아니었다. 앞집의 아주머니가 혼자 살게 된 배경을 물어보았을 때, 옆집에 아저씨가 유복자가 되어 친척의 호적에 올라가 있는 사연, 뒷집 아저씨의 죽은 형님의 이야기의 배경에는 모두 1950년대 전후의 사건들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소조차도 과거와 떼어 놓을 수 없었다. 1950년대 전후의 격동기에는 집에서 키우던 소를 밤이되면 빨치산 조직원들에게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해 해질무렵이면 광양읍내에 끌고 갔다는 것이다.

마을이 광양읍내에서 약 3km 거리에 있었으므로 중학교에 다니던 외삼촌은 매일같이 소와 함께 그 거리를 걸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당시 광양읍내에는 빨치산(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된 것으로 비정규 게릴라 부대)을 막기 위해 대나무 울타리를 설치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마다 빨치산을 막기 위한 울타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하고 궁금해하기도 했고, 그 모습을 상상도 해 보았다. 

그러던 중 이경모 작가의 ‘격동기의 현장’ 사진중 ‘1949년 3월 광양지역에서 빨치산을 막기 위해 세운 대나무 울타리’ 사진을 보았다.

이야기 속의 대나무 울타리는 실재했었고,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빨치산을 막기 위해 세운 대나무 울타리의 설치는 여순사건과 관련이 있다.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은 제주 4.3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고 1948년 10월 22-23일 정부는 순천 탈환 작전에 성공, 봉기군은 수세에 몰린다.

순천에 있던 봉기군의 일부는 22일경 광양읍을 점령한 후 백운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광양 지역은 군경 토벌대와 빨치산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대 7월 말에는 북한군이 광양으로 들어와 약 두 달 동안 광양을 점령하였다. 이후 백운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1951년 1월 광양읍을 기습하였다. 

경찰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광서가 일시 점거되어 읍사무소와 민가가 소실되었다. 

정부는 백운산에서 활동 중인 빨치산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여 방어벽을 구축하고 밤낮으로 경계하였다. 

이경모 작가의 대나무 울타리 사진이 1949년 3월에 촬영한 것이므로 광양읍의 대나무 울타리는 상당기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951년 11월 이후 정부는 백운산을 중심으로 군경 합동작전을 펼쳐 빨치산을 소탕했으며, 휴전을 전후한 시기에 빨치산 활동은 거의 종식기에 이르었다. 

세월이 흘러 아픔의 역사는 많은 부분에서 잊혀지고 있으며, 빨치산 방어용 대나무 울타리 또한 유산에 대한 조명이나 활용 방안에 논의 없이 잊혀지고 있다. 

활용측면을 생각하면 아쉽고, 안타까워 ‘광양 빨치산 방어 대나무 울타리’를 되새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