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전이 내 생일이었다. 생일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지만 날짜가 다가오면 작은 기대감 같은 것을 버릴 수가 없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기대하고 행복해하면서 하루를 맞이하고 보냈다. 새벽 0시가 되면 어김없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고, 30년을 한결 같이 선물을 보내주고 있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소중한 마음들을 보면서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생일’이라고 달력에 커다랗게 표시해두고 반강제적으로 아이들에게 선물을 요구했던 날들도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생일날 진정으로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인데 그것을 잊고 산 것이다.
생명과 맞바꾸며 날 낳기 위해 고통을 겪으신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으로 보내는 하루가 바로 진정한 생일을 맞는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생일날 아침이 되면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것이 선물을 받는 것보다 훨씬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친정 부모님께서 광양으로 이사를 오시면서 정말 내가 원하는 생일을 보내게 되었다.
미역국을 끓이고 찰밥을 하고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으로 상을 차려서 함께 아침을 먹은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 용돈까지 주셨다. 나는 그것으로 가까운 지인들을 만나 점심을 먹고 향기 나는 차를 마셨다.
저녁에는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얼굴에 마사지 팩을 붙이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지금껏 받지 못했던 가장 큰 생일 선물을 받은 것이다.
올해도 작년과 같이 보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시지만 아직은 나를 알아보시는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옛날을 더듬어 보는 시간도 가졌다. 백마고지 용사이신 아버지와 함께 <고지전>영화를 보면서 전쟁의 비극을 더듬어보기도 했다.
어릴 때 나는 누구보다도 생일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요즘 아이들과는 다르지만 멋진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일이 되면 어머니께서는 미역국을 끓여주시고 보리밥이 많이 섞인 밥 대신 찰밥을 해 주셨다. 그리고 그 날 하루만은 집안 일이 아무리 바빠도 일을 시키지 않았고, 마음대로 놀아도 되는 자유를 주셨다.
숨이 컥, 컥, 막히는 밭이랑 속으로 들어가 뙤약볕 아래서 김을 매지 않아도 되었고, 우물물을 길어다 장독마다 그릇마다 가득가득 채우지 않아도 되었다.
밥을 짓는 어머니 곁에 쪼그리고 앉아 생솔가지 타는 매운 연기에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었다.
100마리가 넘는 닭장 속의 닭들이 쏟아내는 분뇨를 치우지 않아도 되었고, 수없이 손님들이 들락거리는 가게를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손가락이 시뻘겋게 물이 들고 가시가 박히도록 성게 알을 까지 않아도 되었고, 팔다 남은 메밀묵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방안에서 꼼짝도 않고 하루 종일 배 깔고 엎드려 책을 봐도 되었고, 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공기놀이와 고무줄놀이를 해도 되었고, 엄마가 주신 용돈으로 우리 가게가 아닌 다른 가게의 손님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 년 중 생일날이 가장 행복했다.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해마다 빠짐없이 우리 4남매의 생일을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결혼을 한 뒤로 바쁜 생활 속에서 내 생일상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치만 보다가 넘기다보니 아예 내 생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엄마 생일이 언제라고 광고를 했고, 작은 카드 한 장이라도 받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생일은 내가 축하 받을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날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어리석음에 부끄러워진다.
“얼마나 더웠던지 방문을 있는 대로 다 열어놓고 니를 낳았다.”
내 생일만 다가오면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오늘따라 가슴을 메이게 한다. 사라호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하던 해 여름에 나는 태어났다.
내가 유달리 고집이 세고, 한 번 마음먹은 것은 죽어도 해야 되는 강한 성격인 것은 사라호의 기질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길을 사이에 두고 바다와 접해 있었던 고향 집은 늘 파도소리 속에서 하루를 열고 닫았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창문을 때리며 달려오는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잠이 깨면서 나는 성장했다.
50년대를 마감하는 1959년 여름, 막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음력 7월 중순에 나는 뜨거운 대지의 기운을 들이키며 세상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세상의 빛을 본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력이 세다는 A급 사라호 태풍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최초의 시련이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어린 나를 업고 추석 음식을 하시다가 부엌 안으로까지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피난 보따리를 쌌다고 한다.
네 살짜리 오빠와 두 살짜리 언니까지 보듬어 안고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집에 몸을 피하고 있는 사이 방 두 칸 자리 연약한 초가지붕은 힘없이 날아가 버렸단다.
어머니께서는 핏덩이 나를 들쳐 업으시고 기둥만 남은 초가집을 다시 세우시느라 온몸의 뼈가 다 녹아내렸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등에 업혀 있던 나는 힘든 상황을 알기라도 한 듯 울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떤 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끈기가 있다.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따라 적응도 잘 한다. 한없이 여린 소녀 같으면서도 거센 폭풍우 앞에서는 바위처럼 맞서는 용기도 생긴다.
하고자하는 일 앞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이 있어도 꿈쩍도 않고 버틸 수 있을 만큼 강하다. 스스로를 알고 조용히 물러서서 고통과 슬픔을 안으로 삭이며 인내할 줄도 안다. 하지만 때로는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 한줌 재조차 남지 않을 만큼 정열적인 면도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얻어내지만, 내게 필요 없는 것은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관심이 없다.
날마다 거친 바다와 싸우며 미역과 김을 따고 뱃고동 소리에 맞춰 삶을 이어가는 어머니의 강한 모습을 나는 닮은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보름 전에 있었던 내 생일날을 생각하며 잠을 설치고 있는 이 새벽, 나는 홀로 깨어 밖으로 나간다.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아파트 창살 위에 별들이 가득 걸려 있다.
조금은 쌀쌀함이 느껴지는 새벽공기가 심장을 활짝 열어젖힌다. 올해는 유난히 날씨가 더웠다. 너무 더워서 참을 수 없다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여름이 덥다고 해도 자식을 낳는 고통만큼 참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나 또한 두 아이를 낳은 엄마로서 세상의 그 어떤 고통도 힘겨운 일들도 모두 견뎌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 뜨거운 여름의 끓는 태양아래서도 묵묵히 자신을 지켜내는 나무들처럼, 어떤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우뚝 설 수 있도록 당당해지고 싶다. 태풍의 눈이 되어 행복의 빛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나를 담금질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잘 살았다고 나를 다독거려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하여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