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청송 김기 명인
“지금 방영중인 ‘이산’이라는 드라마 있지? 정조가 쏘는 화살을 자세히 봐. 그 화살이 바로 이곳에서 제작된 것이야. 주몽이 쏘던 화살도 직접 만들었지.” 화살하나하나에 대한 자부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극이 드라마를 평정하고 있는 요즘, 사극에서 빠질 수 없는 장면은 말 타고 화살을 당기는 장면이다. 화살을 당기고 칼을 쓰는 장면이야 말로 사극의 묘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광양은 크나큰 행운을 가지고 있는 고장임에 틀림없다. 도암 박용기(중요무형문화제 제60호) 명인이 장도를, 청송 김기(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 명인이 화살을 제작하고 있어 사극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지역 명인들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광양읍 읍내리. 옛 광양읍사무소 뒤편 골목 이층집이 김기(67) 명인의 자택이자 작업실이다. 김 명인의 거실에는 직접 제작한 화살이 곳곳에 장식돼 장인의 기품이 그대로 묻어난다. “요즘 우리집이 공사 중이어서 조금 시끄러울거야.” 김 명인은 홀로 작업하기에 알맞은 작업실로 안내한다. 작업실에는 재료로 사용할 시누대가 벽 한쪽에 켠켠이 쌓여있다.
화살과 맺은 인연 50년의 인연
어느덧 김 명인이 화살과 인연을 맺은 지는 50년의 세월이 훌쩍 넘어간다. 1940년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 후 아버지를 따라 여수에 자리를 잡았다. 김 명인은 “15세때이던 당시 화살 만드는 당대의 명장이 좋은 화살대 재료를 찾아 여수에 왔다”며 “이때 박상준 선생과 인연을 맺은 것이 내 인생의 출발점이었다”고 설명했다. 박상준 선생은 조명제, 이석훈 선생과 함께 6.25 때 개성에서 내려와 전통 화살 제작 부문 국가중요무형문화재 47호 ‘궁시장’으로 지정된 명장이다.
그는 박 선생의 일을 도와주다 박 선생이 여수를 떠난 뒤 화살에 대해 국내 최고의 명인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마산의 조명제 선생을 찾아갔다. 조 선생 밑에서 6년여 동안 기술을 배운 그는 군복무를 마친 후, 27세 때 경남 창원에서 첫 공방을 열었다.
완성된 화살, 133번의 공정 거쳐야
1974년부터 광양에 터를 잡은 김 명인은 공방에서 만든 화살을 궁도장에서 직접 쏘아보며 연구를 거듭해 궁도장이 됐다. “그냥 이렇게 반듯한 화살로만 보이지? 시누대가 화살이 되려면 자그마치 133번의 손이 가야해. 공정도 공정이지만 시누대를 비롯한 재료 구하기가 쉽지 않지.” 화살을 돋보이게 하는 꿩깃 작업의 경우 꿩 한 마리로 화살 2개 밖에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주재료인 시누대 역시 서리가 내린 후 햇볕과 해풍을 고루 맞고 자란 강원도 고성과 양양 일대 2-3년생 시누대를 사용해야 한다.
1974년부터 광양에 터를 잡은 김 명인은 공방에서 만든 화살을 궁도장에서 직접 쏘아보며 연구를 거듭해 궁도장이 됐다. “그냥 이렇게 반듯한 화살로만 보이지? 시누대가 화살이 되려면 자그마치 133번의 손이 가야해. 공정도 공정이지만 시누대를 비롯한 재료 구하기가 쉽지 않지.” 화살을 돋보이게 하는 꿩깃 작업의 경우 꿩 한 마리로 화살 2개 밖에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주재료인 시누대 역시 서리가 내린 후 햇볕과 해풍을 고루 맞고 자란 강원도 고성과 양양 일대 2-3년생 시누대를 사용해야 한다.
과거 오동도의 시누대가 좋은 재료로 사용됐으나 오동도가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이곳 시누대는 일체 베어가는 것이 금지돼 있다. 김 명인은 “이 곳 시누대도 3년에 한 번 정도 속아줘야 좋은 나무가 자랄 수 있는데 아쉽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공정 초반 3개월 동안 음지와 양지를 번갈아 가며 건조시킨 살대는 무게와 직경 등이 일정한 것을 선별한 후, 선별된 살대는 불에 구워 강도와 색깔을 내고 활줄을 끼울 오늬와 깃을 다는 작업을 한다. 오늬는 싸리나무로 만들며 오늬와 살대는 소등심으로 연결한 뒤 민어 부레풀을 이용, 복숭아 껍질로 감싸 화살이 터지고 습기가 엄습하는 것을 막는다.
130번 이상 공정 작업을 통하다 보니 하루에 많아야 서너 개밖에 만들지 못한다는 게 김 명인의 말이다. 그가 지금까지 만든 화살은 12만개가 넘는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작업할 때도 부지기수다. 그가 피땀흘려 제작한 화살은 각종 전시회. 드라마ㆍ영화 촬영장, 전국 궁도장 등지에서 한껏 빛을 발휘한다. 그렇다고 궁도장에서 아무나 김 명인이 제작한 화살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궁도 4단 이상의 고수만이 그의 화살을 다룰 자격이 주어진다.
화살 속에 묻어둔 아픔
이런 결실을 맺기 까지 김 명인은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86년 전남도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기쁨도 찰나, 이듬해 작업 중 왼쪽 엄지손가락이 절단된 큰 사고를 당했다. “화살을 만들지 않았다면 절단된 채 그대로 놔뒀을 거야. 그러나 왼쪽 엄지손가락이 없으면 화살을 절대 만들 수 없어. 봉합수술을 받느라고 한 동한 많은 고생을 했지.”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왼 엄지손가락을 매만졌다.
그는 손가락이 절단 된 후 온 몸 이곳저곳 피부를 이식해 3년간 8차례나 접합수술을 했다. 당시 의료기술이 변변치 않아 고생은 더욱더 심했다. 그래도 화살 제작을 멈출 수 없어 아픈 몸을 이끌고 또다시 화살대를 만졌다. 김 명인은 사고 후 30년이 지난 지금도 날씨가 추워지면 두터운 장갑을 낀다. “장갑낀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게 보이지는 않아도 할 수 없어. 추우면 부상 부위가 더욱더 저리거든.”
대나무 화살의 수요가 줄어드는 것도 김 명인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요즘 궁도장에서는 대부분 카본으로 만든 플라스틱 활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나무 화살의 사용량은 갈수록 줄어든다. 또한 대나무 화살이 생활용품이나 액세서리가 아니다 보니 일반인들에게는 사용처가 거의 없다. 그만큼 소비처는 국궁 등 특정 목적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궁시 전수장 이뤄졌으면
김 명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전수장이 없다는 게 작품활동에 가장 큰 고민거리다. 일반 가정 작업장에서 작품을 제작하다 보니 이에 따른 부작용도 발생한다. “화살 만드는 작업이 먼지도 많이 나고 소음도 많아서 이웃 주민들과 하루에도 몇 번씩 마찰이 일어나지. 변두리에 전수장을 만들려고 노력중인데 여의치가 않구먼.”
김 명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전수장이 없다는 게 작품활동에 가장 큰 고민거리다. 일반 가정 작업장에서 작품을 제작하다 보니 이에 따른 부작용도 발생한다. “화살 만드는 작업이 먼지도 많이 나고 소음도 많아서 이웃 주민들과 하루에도 몇 번씩 마찰이 일어나지. 변두리에 전수장을 만들려고 노력중인데 여의치가 않구먼.”
김 명인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다. 우리지역에 궁시 전수장을 만들어 관광 상품화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생각해봐. 드라마처럼 관광객들이 널따란 장소에서 군복을 입고 활을 쏘는 이벤트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놀이와 교육이 되겠어. 선조들의 기품도 배울 수 있고,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김 명인은 폐교 등을 활용하는 방안도 한 가지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방치된 폐교를 개보수한 후 우리나라 화살은 물론, 전 세계의 활과 화살을 전시하고 운동장에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체험 장소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현재 궁도 4단인 그는 각종 전국궁도대회에도 참가해 수상하는 등 빼어난 궁도실력을 갖췄다.
그는 지난 18일부터 이틀간 담양에서 열린 제7회전남연합회장기 생활체육궁도대회에서 3위에 입상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매일 궁도장을 찾아 활쏘기를 연습하는 김 명인은 지난해 광양 비봉정 사두로 역임했으며 올해부터는 유림정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 명인은 또한 각종 공예전에 20여차례 이상 입선한 것을 비롯 현재 전남 공예품대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공예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김 명인이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내던지는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화살처럼 올곧은 마음을 가져야해. 비뚤어진 화살로는 절대 과녁을 맞힐 수 없지. 여기에 선조들의 지혜와 정신이 담겨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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