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7. 광양읍 역사와 문화 ①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7. 광양읍 역사와 문화 ①
  • 광양뉴스
  • 승인 2013.10.14 09:48
  • 호수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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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깊은 유당공원의 정취 광양읍성 위용 펼친 광양의 핵심지

광양읍 항공사진 전경 <사진 = 광양시>

지형과 위치   

광양읍은 옛부터 고을 전체를 대표하는 핵심지다. 남해안의 중심지나 광양의 지형으로 보면 서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해안과 접해 있다. 출토된 유물은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근거인 돌석기(사냥도구)가 인근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신석기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청동기 시대 사람의 시신을 매장했던 돌무덤인 지석묘와 유물ㆍ유적을 살펴보면 당시 광양읍 본통 지역은 해안의 갯벌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연유는 봉강면 석사리ㆍ옥룡면 산남리ㆍ광양읍 덕례리 지석묘군과 용강리서 출토된 패총으로 보아 가능하고 지구상 해수면은 10만년에 100m(연간 1㎜)씩 낮아진다는 지리전문가의 서술에 의하면 추정이 가능하다.

언제부터 광양에 사람이 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유물과 유적의 검사로 추리한다. 이는 보편적인 상식이나 일반적인 추리가 아닌 과학적인 근거로 전문가들의 분석과 조사연구로 얻어낸 결론인 것이다.

국가의 형성으로 인한 지명의 유래를 역사에 의해 조명해 보면 광양은 백제 근초고왕(346~374년)때 마로현이라 했고, 통일신라 때 희양현(757년), 고려에 들어 광양현(940년)이었으며 1895년에 광양군으로 변경되고 1995년 1월1일 광양시가 되었다. 

광양읍은 배산임수(背山臨水)로 북쪽에는 백운산이요 남쪽은 넓은 갯벌이 펼쳐져있어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중심부 동쪽에는 동천, 서쪽에는 서천이 있어 백운산 골짜기에서 폭우로 인한 홍수가 밀려와도 배수가 잘되어 그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현감이 상주해 있었으며 임금님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셨고 성안에 집무를 관장했던 객사ㆍ동헌ㆍ작청ㆍ훈도청ㆍ장방청ㆍ장청ㆍ형방청ㆍ통인청ㆍ향청ㆍ관노청ㆍ현사ㆍ본청ㆍ향사당ㆍ폐문류 등이 읍성 안에 함께 있어 국사를 수행했었다.

조선조 초기부터 교육기관이던 향교와 서원이 있었고, 유서 깊은 유당공원이 있어 오랜 역사와 문화의 고장임을 증명하고 있다. 

역사적 발전과 생활상

기록으로 보면 백제시대의 마로현으로 시작해 5세기 말 한때 성산가야에 일시 소속되었으나 513년 다시 백제관할로 환원되었고 5방중 남방에 속했던 것이다. 신라경덕왕 16년에 희양현(晞陽顯)으로 변경된 명칭은 삼국사기(1145년)와 세종신록지리지(1454년)에 명기돼 있다.

고려 태조 23년(940) 희양현을 광양현으로 개칭해 승평군의 영현(領縣)으로 함에 따라 지시와 전달을 받게 됐다. 1172년 광양현이 처음으로 중앙관리인 감무(監務)를 두고 승평군에서 분리됨에 따라 중앙관리가 부임하게 된다. 그 후 241년이 지난 1413년(호패법이 시행된 해)에 감무를 현감(종 6품)으로 바꾸어 배치됨에 따라 광양고을은 처음으로 현감이 독자적인 지배하게 된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가을 왜군에 의해 2개월간 광양읍성이 함락됐으나 그해 12월 바로 회복된 쓰라린 역사를 안고 있다. 영조 35년(1760)에 광양현은 12면을 관리한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며 그중 광양읍지역의 면으로는 우장면ㆍ인덕면ㆍ칠성면ㆍ사라곡면으로 총 호수는 1,024호이며 인구는 3,820명으로 나타난다.

이때 면의 장을 권농사에서 농무관으로 명칭이 바뀐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순천군 용두면 지봉리 일부가 인덕면 덕례리(덕산촌)에 편입되고, 해룡면 산두리·봉오리 일부가 인덕면 세풍리에 속하게 되며 광양군 인덕면 동지리 일부가 순천군 해룡면 복성리에 편입된다.

또한 같은 법령에 따라 읍 지역 행정개편내용은 우장면ㆍ칠성면ㆍ사곡면이 합해 광양면이 되면서 광양면은 10개리로 개편되었다. 그 후 전라남도령에 의해 1925년 광양면과 인덕면이 합쳐 광양면이 되면서 8개면이 된 것이다.     

광양읍 유적으로 읍성과 마로산성을 갖고 있다. 읍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선조 태종 15년 전라도 관찰사 박습의 계문으로 보아 광양현을 설치한 이전부터 성이 쌓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목책성(木柵城)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후 성종의 명으로 성을 다시 쌓도록 하였으나 완성된 상태는 아니었으며 문종 원년에 하삼도 체찰사 정분(鄭芬)의 순찰보고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 읍성이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규모는 둘레 1,812척, 높이 7척6촌, 여장고(성위에 낮게 쌓은 담) 3척, 성문 3곳, 해자 1,995척으로서 성곽시설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기록으로 보아 1925년 전후하여 읍성은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현재는 성벽과 성문 모두 없어졌으나 2012년 광양시에서 그 흔적을 찾아 도식화를 마쳤다. 

생활상은 수렵시대가 끝나고 농경시대로 발전함에 따라 인구(출산과 유입)가 급격히 증가됨으로 갯벌을 농토로 일구었고 도로를 개설하게 되었다. 비좁은 농토지만 근면과 성실로 삶의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교육열이 남달라 향교와 서원에서 학문을 탐구하는 초동이 많아 특출한 인물이 배출되기도 했다.

또한 애국심이 강해 정유재란과 여순반란사건의 상처를 떨치고 고장을 지키겠다는 선비정신이 배어있음은 고장의 자랑이다. 뿐만이 아니라 애향심이 강해 고향을 떠난 많은 향우들까지 고향의 발전에 참여하고 있다.


유적과 유물  

문화재를 고찰해 보면 국가지정 사적 제 492호 마로산성·천연기념물 제 235호 광양읍수와 이팝나무ㆍ국가등록 중요무형문화재 제 60호 장도장ㆍ무형문화재 광양궁시장과 전라남도 지정 등록문화재 서생 유허비ㆍ유형문화재 제 111호 광양향교ㆍ광양시 향토문화재 지정 제1호 인서리 우달홍 정려비와 세수제ㆍ제2호 덕례리 김치조 칭송편액ㆍ제7호 유당공원내 비군ㆍ제11호 광양 수성당 등이 있다. 그 외 유적지로 가름할 수 있는 익신역ㆍ인동리 등막등(燈臺)ㆍ세풍리 해창 유자섬의 점토대토기 유적지ㆍ사곡 광산 등이 있다.

광산은 근세 광양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초남리 현월과 사곡리 본정·점동마을 일대를 중심으로 광맥이 발견되어 채굴해 오다가 왜정 때 일인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중일전쟁을 계기로 총독부에서‘산금장려정책’을 실시하며 적극 권장했기 때문에 번창하여 지역경제가 흥했으나 해방 후 일시 폐광되었다가 5.16혁명 3년 전부터 이 마을 하태호가 갱내를 복구하여 다시 채굴한 결과 금은동이 많이 생산됐는데 품질이 뛰어나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광양읍성과 마로산성의 유적지는 좀 더 세심한 사적지의 연구와 완전한 복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옛 광양역 앞 100m 지점 인동리 지역 안에 있었던 등막등(燈臺)은 고증을 거쳐 복원함으로써 옛날 광양읍의 지형을 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초남리 향가·본정 마을 시집살이·광양의 향토 문화인 벅구놀이는 더욱 육성해서 보전되기를 바란다.      

고려 때 교통수단으로 역참제도(驛站制度)로 인해 익신역이 있었으며 가장마을에 설치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조 때 시행한 파발제도(擺撥制度)와 봉수제도(烽燧制度)가 있었던 것은 중앙과 지방의 긴급한 소식을 신속 정확하게 소통시켜야 하기 때문에 시행했던 제도이다.

파발제도는 역참을 만들어 대기하고 있던 인마(人馬)로 긴급사항을 릴레이식으로 전달했으며  봉수제는 전국 5개로에 550여개의 산 정상에 직봉을 설치하여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꽃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시행했다.

또한 당시 중요한 통신수단으로서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를 전달하고 관원의 왕래에 따른 숙박의 편의성을 제공하는 원을 설치하기도 했다. 역(驛)과 원(院)은 3~4십리거리에 한곳씩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읍지(邑誌, 1832년)에 驛을 보면 익신역(益申驛)ㆍ섬거역(蟾居驛)이 있었고 院은 아마대원(阿磨代院, 골약동 중양마을)ㆍ蟾津院(진상 섬거)ㆍ玉谷院(옥곡 원적)에 설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다압면과 옥룡에 있었다는 원은 이 읍지에 수록되어 있지 않음을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