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2. 진월면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2. 진월면
  • 광양뉴스
  • 승인 2013.08.26 11:17
  • 호수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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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 경계위에 임진왜란 정기 서린 곳

지형과 위치

진월면은 광양읍에서 동쪽으로 60리 거리에 있으며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돼있고 중간부위가 넓어 고구마와 비슷한 형태이다. 남북 거리는 약 25Km정도며 남쪽에는 섬진강 하단지역으로 망덕 포구아래 장재 마을로 끝나며 남해바다와 접한 곳이다.

국사봉 주맥이 남으로 뻗어가며 동편자락마다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소백산맥의 종점인 망덕산이 끝 매김을 하고 있다. 섬진강은 3도 12개 군을 거쳐 하구에 도달하면 배알도에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동남쪽으로 흐르는 물길은 여수ㆍ남해사이로 흘러가고 있다.

서남쪽으로 흐른 물은 진상천과 옥곡천이 만나 컨테이너 부두를 지나 여수로 흘러가는 물길로 형성돼 있다. 기후와 토질은 광양 전체의 형상과 동일 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강변과 해안선에 접해 있는 특수성을 안고 있는 곳이며 가장 넓은 들의 지질은 빙하기 때보다 해수면이 100미터 낮아지면서 조선조 말까지 대부분 갯벌지대였던 곳이다.

북단에는 중도라는 큰 섬을 품고 있으며 하단에는 포구가 있어 해산물이 풍부해 명성이 알려졌던 지역이다. 더하여 육로와 해상 교통이 편리하고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공을 세운 판옥선을 만들었던 곳과 광양의병대의 전투지는 물론 망덕산과 무접섬의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안고 있어 관광지화 할 수 있는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역사적 발전과 생활상

이 지역은 삼한시대에는 변한지역이란 설이 유력하다. 고려시대를 전후해 이곳에는 특수행정구역 7개소가 있었다. 구석기시대 유물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오사리와 진정리 패총에서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 편과 동물 뼈(사슴)ㆍ패각(굴 껍질)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시체를 매장했던 지석묘가 무접섬 인근에 1기가 있다.

조선조말기인 1895년부터 광양군이 되었으며 그 후 약 백년이 지나 광양시가 되기 전에 진하면과 월포면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통합으로 진월면이 된 지역이다.

광양현은 도서를 34개(유인도 13개, 무인도 21개)를 안고 있었으며 그에 속해 있던 중도는 월포면 지역이었다. 중도는 북쪽에 마조도란 작은 동산이 하나 있었고 샛강을 백마강이라 불렀고 계묘년 대홍수 때 사라지고 없어졌으나 백마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영조 23년 광양현이 12면을 관할했으며 최초로 문헌에 나타난 진하면(津下面) 호구는 273호, 인구 1331명이었고, 월포면(月蒲面)의 호구는 285호이고 인구는 1640명이었다. 진하면 사무소는 당초 방죽마을에 있었으나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월포면과 통합되면서 현재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월포면은 당초 오추마을에 있었으니 1898년 신송마을 82번지로 옮겼으나 진하면과 합병돼 현재의 터에 함께 했으며 그 전 터는 사유재산으로 변해 있다. 

고종 32년 윤달 5월 1일 전국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도입하면서 광양현이 광양군으로 개칭돼 남원부 관할 광양군이 될 때까지 남원부 광양군 진하면과 월포면으로 기록되었던 것이 1896년 칙령에 의해 돌산군이 신설될 때 광양군의 9개 도서가 돌산군 북면으로 소속되었다. 그리고 3년 후에 북면이 태인면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후 15년이 지나 조선총독부 부령(1914년)에 따라 행정구역개편으로 돌산군이 없어지고 광양군으로 환원될 때 진하면과 월포면이 통합되면서 중도는 진월면(10개리 33부락)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때 묘도(괴섬)는 여천군 삼일면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령 제 11027호로 진월면 진정리 삼정 마을이 진상면 청암리에 편입되는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살기 좋은 곳으로 부상

이 지역은 유적과 유물이 많은 곳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과 강은 물론 바다와 접해 있어 먹을거리가 풍부함은 물론 기름진 전답이 있어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교통은 소재지에서 사치(배암 재)를 넘어 진상ㆍ옥곡을 경유해 광양과 하동으로 갈 수 있으며 해방 후까지 중산 패총이 있은 인근에서 나루를 건너 옥곡으로 갈 수 있었다.

중심부에서 북쪽의 경계는 가길마을과 다압면 원동마을이 접해있으며 해방 후까지 강변으로 이어진 오솔길로 하동으로 내왕했다. 해로는 섬진강을 이용해 망덕에서 출발하는 연락선이 묘도와 하포로 내왕했고 하동장날(2ㆍ7일)에 여수와 부산까지는 수로를 이용했다.

망덕포구에는 옛부터 특산물로 소문난 장어ㆍ전어구이와 백합을 시식하고자 찾아오는 미식가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곳이다. 기름진 전답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풍부하고 새로운 기술로 개발된 원예 주산지로 각종채소는 품질이 우수해 수출을 하고 있다. 또한 산간에서 수확하는 매실·밤·감등으로 많은 소득을 취하고 있으니 살만한 곳이다.


유적과 유물

문화유적과 유물의 명소로는 전라남도 등록문화재인 윤동주 시 유고 보존 처와 문화재 자료인 신아보류가 있으며 광양시 지정으로 김대례공신비(송금리)와 돈탁마을 숲이 있다. 또한 유적지로 돈탁ㆍ이정ㆍ중산의 폐총이 있다. 그리고 신아보류가 있으며 강 건너 맞은편은 하동군이며 산봉우리에 노봉산성이 마주보고 있다. 월포 5일 시장(사평나루터, 江灘)은 광양현(읍지, 1798년)지에 명기돼 있고 염전으로 노을도소(奴乙道所, 오사리)가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많은 인구가 기거했음을 알 수 있다.

진월면의 특징은 교통의 편리함은 육로로는 남해안 고속도로가 중심지를 관통하고 있으며 이용의 편의를 위해 인터체인지와 섬진강 휴게소가 있으며 강변을 따라 개설된 자전거 길을 활용하면 전국방방곡곡을 달릴 수 있으며 사치(배암재)를 이용해 진상면ㆍ옥곡면ㆍ광양읍ㆍ시청ㆍ하동방면으로 쉽게 갈 수 있다. 또한 남쪽에 있는 태인교를 건너면 태인동·금호동·시청으로 쉽게 다닐 수 있으며 이순신대교를 이용하면 여수까지 10분대에 갈수 있다.


명소가 있는 마을

각 마을에 산재한 유물과 유적을 찾아보기 위해 망덕리에 들렸다. 이 마을은 망덕산을 등지고 있으며 이산은 무주군 덕유산과 남해의 망운산을 바라본다고 하여 망덕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망덕산은 ‘天子奉朝穴’의 명당이 있다하여 예나 지금이나 양반과 선비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해 찾고 있으며 교통의 요충지로 해상과 육상의 소통이 원활하며 덕선사ㆍ연등사ㆍ부석정ㆍ진남루ㆍ내 고향 망덕포구 시비ㆍ윤동주 시비ㆍ서당(강처중, 조부로부터 3대가 훈장을 엮임 한 유서 깊은 서당)·전어 조형물 등이 있다.

그리고 매년 가을에 전어축제가 개최되고 있으며 ‘전어 뱃노래’가 보존되고 있다. 이 지역은 조선조 후기부터 이어오던 망덕 장어구이는 맛이 독특해 명성이 높았으니 그 명성을 이어갈 수 있는 방책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광양지역 의병부대가 왜인이 상주하는 것을 알고 야밤에 전투를 전개하여 승전한 곳이다.

그리고 인접한 선소마을은 진월면의 중심지로 시설물로는 면사무소, 우체국, 지서, 보건소, 농민상담소, 소방서, 진월초등학교, 진월정 등이 있으며 무접섬을 개발하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오관오포 중 한곳으로 광양현의 수군기지였으며 임진장에 의하면 판옥선을 마들었고 전선 4척(전선1척ㆍ병선1척ㆍ사후선2척)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근거로 선소창ㆍ군장(군수장이 기거하던 곳)터가 있었다.

구면사무소 건물 전면 출입구는 독특한 문양으로 새겨져 문화적 가치로 보존하고 있으며 뒤 언덕에는 역대 면장 7명의 이름이 돌에 음각돼 있다. 제9대 신민당 국회의원 박병효는 이곳 출신이다.

이정마을 이름은 그 생김개가 실가지 모양 같다하여 ‘이도’라고 하였다. 그 후 해수면이 낮아져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아 육지와 연결되고 샘물이 좋기로 이름나 ‘이정’으로 개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 뒤편 저수지와 오인문 휼민영세 불망비ㆍ오화용 공적 비(주민이 1981년 세움), 영산재(靈山齋, 영산신씨 재각), 오태경 전통가옥이 있으며 유적지인 이정패총은 신기로 넘어가는 길옆에 있다.  

차동마을은 세종실록지리와 국가중요문헌에 차의포소(車衣浦所)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고려이전에 이미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오래전에 이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앞들은 갈대밭이었다고 전해진다.

문화유산으로는 효자 안진묵 정려비(1893년 건립, 저수지 보완공사로 현재 비각은 없어지고 비만 남아있으며 기우만이 쓴 비에 그의 업적이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용암재(龍巖齋, 순응안씨 재각 1929년 건립)와 청모재(淸慕齋, 전주이씨 재각 1978년 건립)가 있으며 풍치목인 당산나무 12그루가 있다.

오추마을은 진월면이 통합되기 이전에 이 마을부터 월포면 지역이었고 옛 월포면사무소(오사리 694번지)가 1898년 송금리(신송마을 68번지)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 마을에 있었다. 마을에는 숭추재(남원양씨 재각)와 금오사 그리고 ‘행군수 김홍영 공적비’(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움)가 세워져 있다.

마을 뒷산에 백제시대 산성으로 추정되는 봉암산성을 인근동민이 축성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때 궁답(宮房田, 후비ㆍ왕자군ㆍ공주ㆍ옹주 등 각 궁방에 지급된 토지)이 인근에 많이 있었고 외지(하동ㆍ남해ㆍ구례)에 있던 궁답까지 관리한 사람을 이후공이라 했다. 받은 세를 보관하던 창고 3동이 있었으며 해방 후 모두 폐쇄했고 그 터는 지금은 개인 소유로 되어 있다. 옥곡면 의암부락에 있던 궁답 50여 두락도 이 궁방전 관리에 예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평마을에 5일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위치가 모호해 확인결과 주민 강경진의 증언에 의하면 사평나루터가 장터거리였으며 일제 때 일인 후지하라가 이곳에 과수원(배)을 조성했다고 전해준다.

이곳은 섬진강하구에 속하며 전라도와 경상도를 왕래할 수 있는 나루터는 이곳뿐이었다. 그리하여 농산물ㆍ해산물은 물론 공산품과 생활용품을 구입하고 교환하는 장터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염전의 위치는 오래전 일이고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을에 모원재(慕遠齋, 진주 강씨 재각)ㆍ자혜불망비(최관현 진월면장, 사평-오추간 제방을 구축하여 농지 200여 두락을 어려운 주민에게 경작토록 한 송덕비이고 부인 함안조씨 자선불망비)도 함께 있다.

돈탁마을에는 향보재(享保齋, 금녕김씨 재각)와 은사 김영규 공적비가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돈탁 패총(신석기 시대 유물이 산포된 지역. 수습된 유물은 빗살무늬 토기 편과 동물 뼈, 패각 등)이 있다. 그리고 풍치목으로 소나무 수령 250년 된 고목 100여 그루가 있으며 향토문화유산 제 10호로 등록돼 있다. 

금동마을은 고려이전에는 거을망포(巨乙亡浦)지역으로 전하하는 것은 포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호구총수에는 월송우촌으로 기록하고 있다. 문화유산 운양재(雲陽齋, 이천서씨 상서공파 재각, 옛 서당)와 삼봉정ㆍ송금재ㆍ은포정이 있으며 풍치목과 수령 약 450년 된 고목이 남아있다. 중도마을은 부근에 있던 마조도와 함께 문헌상 기록에는 월포면에 속하였다.

한때는 월등도라 했는데, 섬이 마치 달이 떠오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된 지역이며 단위마을로는 소득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조선통독부령 제111호 도ㆍ부ㆍ군의 명칭, 위치, 관할구역 등이 변경될 때 광양군으로 환원 된 곳이다. 마을의 특성을 찾다보니 하루의 해가 짧아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어 탐방을 마치고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