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희 동림당 한의원 원장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향의 추억은 인생살이가 고달프고 힘들고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때, 어느정도 인생을 뒤돌아 볼 나이가 되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같은 마음이겠지요.
수구지심이랄까. 이루어지기 힘든 귀향이라 더욱 고향의 체취를 느끼고 싶은 마음이 있고 태생은 속일수 없어 땅이 주는 안락함과 포근함이 그립고. 어릴때부터 가수의 꿈을 "딴따라의 인생은 입의 풀칠도 할 수 없다"는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에 그 꿈을 접고 방황하든 시절들.
그렇지만 지금도 아스팔트를 뚫고 나와 핀 민들레에 넋이빠져 있기도 하는 여린 감성은 살아있어 떠나자 떠나자하고 십 수년. 지금은 내가 원하든 길과 다른길을 떠밀리고 부딪치며 흘러왔습니다.
애증이 뒤섞인 시절의 추억은 돌이 강물에 깍여 예쁜 조약돌이 되듯 증(憎)은 사라지고 애(愛)만 남게되는것 같습니다. 나의 출생지는 광양읍 익신리 물좋고 경치좋은 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뒷산이 12폭의 병풍처럼 동양화 펼쳐놓은 것 같이 사계의 빛갈을 채색시키고 삼밭등이란 곳에 호랑이 바위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30여만평의 광활한 농토가 바둑판을 보는듯이 사각이 반듯하게 농 경기 정리가 잘되여있는 곳입니다.
남초등학교 앞으로 흐르는 강물은 새 보막이를 하여 익신리의 앞 들역에 농수로로 이동하여 대평온의 물 공급을 해주는 곳이기도 한데 이곳은 하절기엔 동네 야외 수영장 이라고도 칭하고 싶습니다. 남초등학교 하교길의 뚝방길로 걸어와서 이곳에서 물장구 치면서 오후 한때를 보내곤 하였고 저녁이면 동네 아낙네들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목욕탕이었습니다. 동절기엔 스케이트장으로 동심의 세계에 추억의 장소로 각광을 받는 곳입니다.
남쪽은 초남 앞바다가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식단을 즐겁게 해주는 어물반찬 가계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봄 여름 가을엔 바다 물때를 맞추어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그룹을 지여 갱조개, 고막, 새조개, 낚지을 채취하였고 남자들은 문절어(망둥어)를 낚아서 가족의 식단을 풍요롭게 해주던 곳이 초남 앞 바다였습니다.
저녁이면 횃불과 간드래(카바이트불)를 켜고 바다가 수로를 따라 게도 잡고 한가롭게 자고 있는 물고기도 작살로 잡다보면 대어들도 간혹 잡히곤 하였습니다. 대어를 잡은 날은 횡재를 하는 날이고 그날 저녁 아버님은 회무침으로 탁빼기 한잔하시면서 그날의 즐거움을 함께 나눈때가 다반사였습니다.
우리동네 집들은 민속촌을 연상케하듯 대다수가 초가집이었습니다. 한 여름이면 앞문은 채앙을 접어 올리고 뒷문은 활짝열어 놓으면 시원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점심때 쯤이면 논에서 돌아오신 아버님이 마루에서 오침하시고 구남매의 둘째인 저는 특별 케이스로 아버님 옆에서 같이 잘 수있는 특권을 누립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신께서 둘째인 제가 낫낫하다고 예쁘게 봐줬니까요.
밤이면 동네 친구들과 공부 한답시고 친구집 사랑방에 모여앉아 구상하는 짓이 수박서리, 참외서리, 감서리, 고구마서리, 감자서리, 콩서리, 닭서리…그러다 혹 들키는 날이면 아버님은 지게 작대기를 준비하시죠.
물론 눈치 빠른 저는 집 뒤로돌아 평소에 잘 넘어다니는 돌담을 비호같이(?) 훌쩍 돌하나 무너뜨리지 않고 넘어가서 돌틈으로 안쪽을 살핍니다. 아버님의 그 황당해 하시는 모습이란 참 불효자죠.
이젠 불효를 용서받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유명을 달리 했으니까요.
당시 나쁜짓을 하는 밤중에 아버님은 눈치채고 계셨겠지만 헛기침 두어번으로 경고만 보내고 맙니다.
우리집은 초가집으로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동네어른들이 품앗이로 이엉을 올리기 위한 작업이 시작됩니다. 날개를 엮고 용마루를 틀고 그 리드미칼하고 숙련된 솜씨는 지켜보면 황홀할 정도입니다.
손은 움직이면서도 걸죽한 육두문자에 막걸리 한 사발에 육자배기 나오고.. 날개가 한개분(지붕에 들어올릴만한 무게로)이 다되면 팽팽하게 말아서 세운 다음 꽝꽝 내려칩니다. 가지런히 하는 것이지요. 용마루 트는것은 정말 예술입니다. 짚 한줌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면 지붕이 만들어지는 모습이란. 지금은 몇분만이 생존의 계시고 모두 뵐 수 없는 분들입니다. 좋은 세상 가셨겠죠.
늦가을에서 이맘 때 쯤이면 초가지붕에 참새잡느라고 형님 또래 친구들은 후레쉬들고 사다리매고 미리 봐 둔 참새집을 습격합니다. 참새 입장에서는 잠 자다가 날벼락이죠.
간혹 참새집에 뱀이 있어 월동준비하러 들어간건지 참새 잡아먹으러 간건지 혼비백산해 사다리에서 떨어지고 초가는 집이 낮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추억은 끝이 없네요.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의 자락을 붙잡고 있다보면 왜이리 항상 콧날이 시큰해지는지 혼자서 쑥스러워합니다.
나이가 반백년이 되어 추억하는 것에 시간을 더 할애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마음은 항상 이십대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많아 계획대로 하다가는 이백살은 훌쩍 넘겨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옛날을 생각하니 또 다시 코끝이 싸아 하네요.
장성해서도 어머님의 젖가슴을 만지며 어리광을 부렸는데 이젠 만져 볼 젖가슴도 기억과 같이 사라지고 없네요. 서울에 있으면서 고향 소식을 자주 접하고 광양을 홍보 하고 싶어서 <광양사모>광양을 사랑하는 모임 카페을 운영 하게 되었습니다. 이글을 보신 광양인은 다음 싸이트 <광양사모>광양을 사랑하는 모임(cafe.daum.net/kangylove) 카페로 가입하시고 많은 활동 부탁드립니다.
수구지심이랄까. 이루어지기 힘든 귀향이라 더욱 고향의 체취를 느끼고 싶은 마음이 있고 태생은 속일수 없어 땅이 주는 안락함과 포근함이 그립고. 어릴때부터 가수의 꿈을 "딴따라의 인생은 입의 풀칠도 할 수 없다"는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에 그 꿈을 접고 방황하든 시절들.
그렇지만 지금도 아스팔트를 뚫고 나와 핀 민들레에 넋이빠져 있기도 하는 여린 감성은 살아있어 떠나자 떠나자하고 십 수년. 지금은 내가 원하든 길과 다른길을 떠밀리고 부딪치며 흘러왔습니다.
애증이 뒤섞인 시절의 추억은 돌이 강물에 깍여 예쁜 조약돌이 되듯 증(憎)은 사라지고 애(愛)만 남게되는것 같습니다. 나의 출생지는 광양읍 익신리 물좋고 경치좋은 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뒷산이 12폭의 병풍처럼 동양화 펼쳐놓은 것 같이 사계의 빛갈을 채색시키고 삼밭등이란 곳에 호랑이 바위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30여만평의 광활한 농토가 바둑판을 보는듯이 사각이 반듯하게 농 경기 정리가 잘되여있는 곳입니다.
남초등학교 앞으로 흐르는 강물은 새 보막이를 하여 익신리의 앞 들역에 농수로로 이동하여 대평온의 물 공급을 해주는 곳이기도 한데 이곳은 하절기엔 동네 야외 수영장 이라고도 칭하고 싶습니다. 남초등학교 하교길의 뚝방길로 걸어와서 이곳에서 물장구 치면서 오후 한때를 보내곤 하였고 저녁이면 동네 아낙네들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목욕탕이었습니다. 동절기엔 스케이트장으로 동심의 세계에 추억의 장소로 각광을 받는 곳입니다.
남쪽은 초남 앞바다가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식단을 즐겁게 해주는 어물반찬 가계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봄 여름 가을엔 바다 물때를 맞추어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그룹을 지여 갱조개, 고막, 새조개, 낚지을 채취하였고 남자들은 문절어(망둥어)를 낚아서 가족의 식단을 풍요롭게 해주던 곳이 초남 앞 바다였습니다.
저녁이면 횃불과 간드래(카바이트불)를 켜고 바다가 수로를 따라 게도 잡고 한가롭게 자고 있는 물고기도 작살로 잡다보면 대어들도 간혹 잡히곤 하였습니다. 대어를 잡은 날은 횡재를 하는 날이고 그날 저녁 아버님은 회무침으로 탁빼기 한잔하시면서 그날의 즐거움을 함께 나눈때가 다반사였습니다.
우리동네 집들은 민속촌을 연상케하듯 대다수가 초가집이었습니다. 한 여름이면 앞문은 채앙을 접어 올리고 뒷문은 활짝열어 놓으면 시원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점심때 쯤이면 논에서 돌아오신 아버님이 마루에서 오침하시고 구남매의 둘째인 저는 특별 케이스로 아버님 옆에서 같이 잘 수있는 특권을 누립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신께서 둘째인 제가 낫낫하다고 예쁘게 봐줬니까요.
밤이면 동네 친구들과 공부 한답시고 친구집 사랑방에 모여앉아 구상하는 짓이 수박서리, 참외서리, 감서리, 고구마서리, 감자서리, 콩서리, 닭서리…그러다 혹 들키는 날이면 아버님은 지게 작대기를 준비하시죠.
물론 눈치 빠른 저는 집 뒤로돌아 평소에 잘 넘어다니는 돌담을 비호같이(?) 훌쩍 돌하나 무너뜨리지 않고 넘어가서 돌틈으로 안쪽을 살핍니다. 아버님의 그 황당해 하시는 모습이란 참 불효자죠.
이젠 불효를 용서받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유명을 달리 했으니까요.
당시 나쁜짓을 하는 밤중에 아버님은 눈치채고 계셨겠지만 헛기침 두어번으로 경고만 보내고 맙니다.
우리집은 초가집으로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동네어른들이 품앗이로 이엉을 올리기 위한 작업이 시작됩니다. 날개를 엮고 용마루를 틀고 그 리드미칼하고 숙련된 솜씨는 지켜보면 황홀할 정도입니다.
손은 움직이면서도 걸죽한 육두문자에 막걸리 한 사발에 육자배기 나오고.. 날개가 한개분(지붕에 들어올릴만한 무게로)이 다되면 팽팽하게 말아서 세운 다음 꽝꽝 내려칩니다. 가지런히 하는 것이지요. 용마루 트는것은 정말 예술입니다. 짚 한줌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면 지붕이 만들어지는 모습이란. 지금은 몇분만이 생존의 계시고 모두 뵐 수 없는 분들입니다. 좋은 세상 가셨겠죠.
늦가을에서 이맘 때 쯤이면 초가지붕에 참새잡느라고 형님 또래 친구들은 후레쉬들고 사다리매고 미리 봐 둔 참새집을 습격합니다. 참새 입장에서는 잠 자다가 날벼락이죠.
간혹 참새집에 뱀이 있어 월동준비하러 들어간건지 참새 잡아먹으러 간건지 혼비백산해 사다리에서 떨어지고 초가는 집이 낮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추억은 끝이 없네요.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의 자락을 붙잡고 있다보면 왜이리 항상 콧날이 시큰해지는지 혼자서 쑥스러워합니다.
나이가 반백년이 되어 추억하는 것에 시간을 더 할애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마음은 항상 이십대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많아 계획대로 하다가는 이백살은 훌쩍 넘겨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옛날을 생각하니 또 다시 코끝이 싸아 하네요.
장성해서도 어머님의 젖가슴을 만지며 어리광을 부렸는데 이젠 만져 볼 젖가슴도 기억과 같이 사라지고 없네요. 서울에 있으면서 고향 소식을 자주 접하고 광양을 홍보 하고 싶어서 <광양사모>광양을 사랑하는 모임 카페을 운영 하게 되었습니다. 이글을 보신 광양인은 다음 싸이트 <광양사모>광양을 사랑하는 모임(cafe.daum.net/kangylove) 카페로 가입하시고 많은 활동 부탁드립니다.
입력 : 2005년 03월 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