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현 용 / 전 수원시 화양초등학교장
고향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다. 정겨운 사람들과 말씨, 음식, 언제나 눈에 선한 아름다운 산천의 풍광 등 어느 것 하나 그립지 않은 것이 없다.
백두대간의 마지막 줄기인 백운산은 힘찬 혈맥과 정기가 뭉쳐 이루어져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영산(靈山)으로 여겨지던 백운산(白雲山)이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감싸 안고 있는 광양은 예로부터 충신, 효자, 열녀 등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기로 유명한 역사의 고장이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광양시 도월리(도청부락)이다. 지금은 100여 호도 안 되는 가구가 남아있어 겨우 과거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200여 호가 넘는 제법 큰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누구나 다 그러하겠지만 고향을 생각하면 수많은 이미지들이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풀꾹새 소리 들으며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갈 때면 늘 넘어야 했던 들곡재, 아카시아나무 무성한 그 산길을 지나가노라면 무서움에 어머니의 손을 꽉 잡던 내 손에 흥건히 배어나던 땀, 외가에서 혼자 집으로 오는 날이면 해안가 먼 길을 돌아서 집에 갔던 일 등 고향에 대한 기억은 가슴속에 무언가 모를 애잔한 감정을 먼저 불러일으키곤 한다.
여름철에 접어들어 더위가 시작되면 ‘새터어리’는 우리의 즐거운 수영장이고 놀이터였다. 미역 감기엔 아직 이른 시기에 성급하게 물속에 들어갔다가 이가 딱딱 마주치도록 떨기도 했다. 구름이 끼어 흐린 날이면 “까시게 줄깨 볕 나라, 송곳 줄깨 볕 나라”를 외쳐댔고, 깊은 냇물 가운데에 돌을 주워다 섬을 쌓고 미역을 감다 지치면 잠시 쉬기도 했다. 아직 수영이 서툴렀을 때는 물을 많이 먹어 배불뚝이가 되면서도 기어이 개헤엄을 익혔다. 지금나의 수영실력은 바로 그 때 익힌 개헤엄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참게나 징게미를 잡고 놀았다. 참게 와 징게미를 모닥불에 구워 먹는 재미는 정말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를 것이다.
보리가 자라 이삭이 팰 무렵이면 들판 곳곳은 온통 만발한 자운영꽃밭이었다. 보리밭 사이 를 동무들과 함께 힘차게 내달리다 솜이불보다 푹신한 그 위에 풀썩 엎드려 가쁜 숨을 쉬노라면 코끝에는 향긋한 꽃 내 음이 스치고, 맑은 하늘 위를 나르는 종달새의 노래 소리는 어느새 천상의 노래가 되어 내 귀를 간질이곤 했다. 그리고 노란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보리밭 사이로 ‘머가지 방천’에 모여 풀을뜯는 동네 소들의 모습은 한없이 푸근한 무언가를 주곤 했다.
이시기에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재미는 해질녘 밀이나 보리를 구워 먹는 것이었다. 동네 형들이 보리나 밀을 베어오고 우리는 짚단을 날라 와 불을 피웠다. 이것을 우리는 ‘밀 타작’, ‘보리타작’이라 했는데 배고팠던 시절, 아무런 간식거리가 없던 그 때에는 대단한 별미였다.
손으로 잘 익은 보리이삭을 비벼서 껍질을 불고 한입에 털어 넣고 맛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얼굴은 검댕이 투성이가 되었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깔깔대고 웃고는 했다. 간혹 주인에게 야단맞는 때도 있었지만 웬만하면 모두가 웃어넘겨주던 인심 좋은 우리고장의 풍경이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이웃과 이웃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이해해 주었던 풋풋한 인정이 넘치는 고향의 정서는 그동안 객지생활 속에서 겪은 온갖 어려움을 꿋꿋이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고, 이웃과 함께 세상을 밝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 주었다.
산업사회의 발달로 고향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가 뛰어놀던 들판의 모습이 사라지고 동리의 모습이 바뀌고, 정겹던 얼굴은 사라졌다. 하지만 산자수려한 고향의 풍광과 풋풋한 나의 고향 광양의 모습은 그리운 어머니의 품속처럼 내 유년의 기억들을 포근히 감싸며 아직도 내 기억 속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백두대간의 마지막 줄기인 백운산은 힘찬 혈맥과 정기가 뭉쳐 이루어져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영산(靈山)으로 여겨지던 백운산(白雲山)이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감싸 안고 있는 광양은 예로부터 충신, 효자, 열녀 등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기로 유명한 역사의 고장이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광양시 도월리(도청부락)이다. 지금은 100여 호도 안 되는 가구가 남아있어 겨우 과거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200여 호가 넘는 제법 큰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누구나 다 그러하겠지만 고향을 생각하면 수많은 이미지들이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풀꾹새 소리 들으며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갈 때면 늘 넘어야 했던 들곡재, 아카시아나무 무성한 그 산길을 지나가노라면 무서움에 어머니의 손을 꽉 잡던 내 손에 흥건히 배어나던 땀, 외가에서 혼자 집으로 오는 날이면 해안가 먼 길을 돌아서 집에 갔던 일 등 고향에 대한 기억은 가슴속에 무언가 모를 애잔한 감정을 먼저 불러일으키곤 한다.
여름철에 접어들어 더위가 시작되면 ‘새터어리’는 우리의 즐거운 수영장이고 놀이터였다. 미역 감기엔 아직 이른 시기에 성급하게 물속에 들어갔다가 이가 딱딱 마주치도록 떨기도 했다. 구름이 끼어 흐린 날이면 “까시게 줄깨 볕 나라, 송곳 줄깨 볕 나라”를 외쳐댔고, 깊은 냇물 가운데에 돌을 주워다 섬을 쌓고 미역을 감다 지치면 잠시 쉬기도 했다. 아직 수영이 서툴렀을 때는 물을 많이 먹어 배불뚝이가 되면서도 기어이 개헤엄을 익혔다. 지금나의 수영실력은 바로 그 때 익힌 개헤엄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참게나 징게미를 잡고 놀았다. 참게 와 징게미를 모닥불에 구워 먹는 재미는 정말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를 것이다.
보리가 자라 이삭이 팰 무렵이면 들판 곳곳은 온통 만발한 자운영꽃밭이었다. 보리밭 사이 를 동무들과 함께 힘차게 내달리다 솜이불보다 푹신한 그 위에 풀썩 엎드려 가쁜 숨을 쉬노라면 코끝에는 향긋한 꽃 내 음이 스치고, 맑은 하늘 위를 나르는 종달새의 노래 소리는 어느새 천상의 노래가 되어 내 귀를 간질이곤 했다. 그리고 노란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보리밭 사이로 ‘머가지 방천’에 모여 풀을뜯는 동네 소들의 모습은 한없이 푸근한 무언가를 주곤 했다.
이시기에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재미는 해질녘 밀이나 보리를 구워 먹는 것이었다. 동네 형들이 보리나 밀을 베어오고 우리는 짚단을 날라 와 불을 피웠다. 이것을 우리는 ‘밀 타작’, ‘보리타작’이라 했는데 배고팠던 시절, 아무런 간식거리가 없던 그 때에는 대단한 별미였다.
손으로 잘 익은 보리이삭을 비벼서 껍질을 불고 한입에 털어 넣고 맛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얼굴은 검댕이 투성이가 되었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깔깔대고 웃고는 했다. 간혹 주인에게 야단맞는 때도 있었지만 웬만하면 모두가 웃어넘겨주던 인심 좋은 우리고장의 풍경이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이웃과 이웃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이해해 주었던 풋풋한 인정이 넘치는 고향의 정서는 그동안 객지생활 속에서 겪은 온갖 어려움을 꿋꿋이 버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고, 이웃과 함께 세상을 밝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 주었다.
산업사회의 발달로 고향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가 뛰어놀던 들판의 모습이 사라지고 동리의 모습이 바뀌고, 정겹던 얼굴은 사라졌다. 하지만 산자수려한 고향의 풍광과 풋풋한 나의 고향 광양의 모습은 그리운 어머니의 품속처럼 내 유년의 기억들을 포근히 감싸며 아직도 내 기억 속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입력 : 2004년 12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