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님들 거쳐간 기도성지 영험 도량
해방후 좌우익 갈등빚은 현대사 간직 고통·속박서 중생해탈 믿음 서려
2007-05-17 귀여운짱구
우리지역문화를 찾아서<10>백 운 사
유난히 많은 아픔과 슬픔을 가진 이땅의 사람들은 과연 무엇에 의지해 한 세상을 견뎌왔는가.
또 그것들을 핏줄로 이어받고 그러한 악연의 사슬에 여지없이 묶여있는 꼴인 오늘의 우린 과연 무엇을 소망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가.
옥룡면 동곡리 361-1 백운산(1218m)바로 아래 800m 고지에 고즈넉이 깃들어 있는 ‘백운사’를 찾아가는 길. 5월을 맞이한 것도 그렇지만 이곳 일대는 빨치산 등 해방후 좌우익의 극심한 갈등을 빚은 현대사의 아픈 현장이기에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서원하면서 ‘관세음보살’을 나직이 몇 번이고 되뇌어 본다.
우리가 직접 체험하거나 목격하지 못한 과거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을 무겁게 짓눌렀던 기억들. 살아 있음 자체가 유죄였으며 기적이었던 한 시대를 통과하면서 익숙해진 체포와 감금, 고문과 학살, 분신과 의문사 등과 같은 단어들이 아직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 잊어버린 채 살고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죽음은 누가 보상하고 누가 제대로 기억해 내고 있단 말인가.
백운산 800m 고지에 자리
대한불교 조계종 광양 백운사(주지 견철스님)는 호남정맥의 최남단을 장식하는 백운산 800m 고지에 자리해 불교계에선 큰 스님들이 거쳐간 기도도량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백운사 견철스님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수도한 것을 비롯, 불일보조국사가 중창을 했고, 공민왕 16년(1367)과 세종19년(1437)에 각각 다시 세웠으나 선조 30년(1597)정유재란으로 불에탔다. 그러나 인조16년(1638)과 헌종 9년(1843),고종9년(1872) 등이 이를 다시 세우며 숱한 세월을 지났으나 1948년 여순사건때 완전 불에 타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백운사는 1960년 구산스님이 복구후 화엄사 이산 도광 대선사께서 주석을 했으나 건물이 노후해 고봉 선사와 그의 손상좌인 지금의 견철스님이 지난 2003년 중창을 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백운사는 크기로야 여느 절보다 턱없이 작고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오랜 나그네의 눈길을 끌어왔던 것도 바로 그 탓이다. 한 집안의 어머니처럼 험한 길의 등불이 되고 어리석음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길잡이가 되며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권능을 거졌다는 관세음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관음신앙이 특정종교에 상관없이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
더욱이 이곳이 대둔산 태고사와 청주 보살사, 서산 간월암 등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기도의 성지이다. 또한 해방후 6.25 전 전남도당책이자 사변후 전남도당 부위원장과 전남유격대장을 겸하던 김선우가 백운사에서 토벌대와 교전 끝에 수류탄으로 자결하기도 하는 등 현대사의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백운사는 길섶의 구르는 돌맹이 하나, 낙엽 한잎조차 그저 의미롭기만 하다. 언제 어디서나 일체중생을 감싸고 돌며 쉼없이 제도하고 있을 관음보살의 손길이 느껴지는 듯 하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껏 그래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아픔과 슬픔이 크다고 느낄수록 그만큼 당사자의 기도와 정성은 간절해지리라. 스스로의 상처가 치유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면 들수록 더욱더 큰 불도 능히 태우지 못하고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으며 모든 악귀도 괴롭힐 수 없다는 세상에 대한 염원은 일종의 실존적 절실함을 넘어 하나의 종교가 되리라.
그런 가운데 각 개인이나 잡단이 취하는 행동방식은 대체로 두가지 형태. 오늘의 현실이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견뎌내 내세에 온통 보장받자는 입장과 죽은 뒤애 어쨌든 현세에서 소원성취하자는 입장으로 갈린다.
그리고 불교적으로 전자가 미륵신앙이라면 후자가 바로 관음신앙에 해당한다. 미래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열망과 신앙화된 것이 미륵사상이라면 관음신앙은 다분히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외면 현세의 고난에서 벗어나 소원성취할 수 있는 영험을 얻고자하는 신앙형태인 것이다.
백운사는 등산인들의 쉼터 아껴야
남한 땅에 ‘백운(白雲)’을 이름 삼은 산은 수십 개에 이른다. 그 중 우리지역 백운산(1218m)을 으뜸으로 꼽는 까닭은 이 산만이 지닌 독특함 때문일 것이다.
호남정맥이 남해바다에 내려앉기 전 최남단을 장식하는 백운산은 봄이면 고로쇠로 인기를 누리는 한편 높이에 걸맞은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특히 골짜기 같은 분위기의 섬진강과, 강 건너 동서로 펼쳐진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는 맛은 그 어느 산에서도 맛볼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
특히 백운사는 백운산 정상을 오르는 등산로의 하나로 등산인들의 쉼터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주지 견철스님은 “경칩을 전후 해서는 백운사에 고로쇠 수액을 마시려는 등산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이들을 수용할 마땅한 장소가 없는게 아쉬움”이라며 “추운 겨울 마실 물과 잠쉬의 쉼을 위해 이곳을 들르는 등산객들을 위해 공양간을 지어야 하는데 여의치 않다”고 토로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등산인들의 준법정신이다. 목마를때 물을 제공하고 추울때 잠시의 피난처가 되고 있는 백운사에 쓰레기를 투기하는 볼썽사나운 일들이 자주 목격된다는 점이다.
또한 백운사 주변 곳곳에는 해방후 좌우익이 갈등을 빚은 현대사의 아픈 현장의 산물이 산재해 있다. 군화와 반합, 참호 등이 널려있다. 이곳 또한 현대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광양시는 물론 어느 누구하나 규명은 커녕, 오히려 반세기가 넘도록 방치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우리지역 유적을 구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뿌리를 부정하는 행위가 될 것이고 ‘문화’와 ‘역사’라는 두 단어를 광양시가 삭제해야 할 것이다.
그런면에서 백운사 일대는 여전히 끊기지 않는 발길 속에서 아직도 다 청산해내지 못한 역사, 아직도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갈등과 불평등 아래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엄청난 악업과 죄를 짓고도 당당하게 권력의 주인행세를 했던 지난 세월에 죽어가고 상처받은 자들 모두 이제 꺼지지 않는 광명의 길에 함께 들기 바라는 현실적 소망탓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