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칼럼] 육대함이(六代含飴) : 육대의 가족이 함께 엿을 먹다
한 세대(世代)라 함은 사람이 태어나서 가정을 이뤄 계승할 때까지의 기간으로 약 30년을 잡는다. 물론 결혼을 빨리 했냐 늦게 했느냐에 따라 서로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성씨(姓氏)와 본관(本貫)을 말할 때 세(世)와 대(代)를 구분해야 한다.
세(世)는 글자대로 십(十)자를 세 개 합한 자와 같다. 세를 따로 보면 30년을 말하며 대(代)는 대신(代身)하여 잇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族譜)를 말할 때 세는 시조(始祖)부터 세어서 본인까지 몇 세 손(孫)이라고 하고, 대는 역으로 자신을 제외하고 부친이 1대, 조부가 2대, 증조부가 3대가 된다. 그러니 대가 세보다 항상 1이 적게 나가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농경사회가 대세여서 전통적으로 대가족(大家族)제도를 이루고 살았으므로 4대는 보통이었다. 4대가 함께 살면 주위에서 볼 때 아주 화목해 보이며 가정교육도 직접 가르치지 않아도 보고 배우는 이른바 산교육 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도시 산업화 사회가 되면서 핵가족(核家族) 시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므로 이런 전통적인 교육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예전에는 제사도 4대 봉사(封祀) 하고 5대 이후로는 묘제(墓祭)나 시제(時祭)로 지냈다.
그런데 9대가 한 집안에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 중국 당(唐) 나라 때 9대가 한집안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나온 고사가 ‘구세동당(九世同堂)’인데 중국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 사람이다.
당 고종은 유명한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아들이고 우리나라 신라(新羅)와 연합하여 백제(百濟)(660)와 고구려(高句麗)(668)를 멸망시킨 우리나라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왕이다.
하루는 당 고종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운주에 있는 장공예(張公藝)의 집에 잠시 들린다. 그 집에 들어가 보니 9대에 걸쳐 100여명의 가족이 화목하게 살고 있었다.
집에 들어간 고종은 제일 어른인 장공예를 찾아가 이렇게 여러 대에 거쳐 많은 수가 화목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장공예는 대답대신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종이를 펼쳐 참을 인(忍)자 100개를 써주었다.
고종 역시 즉석에서 탄복을 하며 ‘백인의문(百人義門)’이라는 휘호를 내리고 백인(百人)의 문(門) 을 세울 것을 명하며 비단 백 필을 하사했다고 《구당서(舊唐書)》에 실려 있다.
이에 못 미치기는 해도 육대(六代)가 함께 살면서 엿을 먹는다는 ‘육대함이(六代含飴)’는 공자의 후손을 가리키며 청(淸)나라 건륭제(乾隆帝)가 한 말이다. 청나라 전성기를 일궈낸 건륭제는 한족이 아닌 이민족 이었지만 공자(孔子)를 몹시 존경했던 인물이다.
재위22년 1757년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를 갔을 때 공자의 후손 중에 가장 연장자인 공육기(孔毓圻)가 67대 손인데 부인 황(黃)씨는 당시 81세였다. 그리고 한해 전에 공자의 72대손인 공헌배(孔憲培)가 태어났다. 그래서 6대가 한 집안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보통 사람도 가업이 번창 하고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렇게 화목하게 사는 광경을 본 건륭제는 식사를 마치고 공자집안에 후식으로 먹는 엿을 먹으며 ‘육대함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선사했다. 천하제일 가문인 공자의 후손들이 여섯 세대가 화목하게 모여 사는 모습이 마치 엿을 먹는 것 같이 달콤할 것 이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중국 당나라 이세민(李世民)의 정관지치(貞觀之治) 이후 최강의 권력을 자랑했던 건륭제는 나중에 한족인 대학사 우민중(于敏中)의 딸을 자기에게 공주로 입양시켜 공자 집안과 혼인 관계를 맺어 공헌배 에게 시집보냈다. 현대에 와서는 구대나 육대는 신화 같은 이야기다. 삼 사 대가 있기는 하지만 함께 사는 것은 드문 현상이다.
지금은 아이 울음소리가 듣기 어려운 시대다. 그렇다고 세월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변화하는 세월만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만들어 자기만의 세월에 맞춰가며 산다면 우리도 마치 엿을 먹는 것처럼 달콤하게 ‘삼대함이’는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