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4차 산업혁명시대 ‘인재상’
세상은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삶의 방식, 커뮤니케이션, 사고방식, 그리고 발전의 의미가 변화하는 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혁명을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 부르며, 최근에는 AI 같은 최신 기술의 도전 앞에서 우리의 자녀들이 앞으로 어떻게 일하고, 생활하며 살 것인지, 즉 질 높은 교육을 잘 선택해 결정해야 할 시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 현대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한다.
이 같은 배경에는 힘없는 국가들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기에, 이에 요구되는 것이 경제력이며, 이 경제력을 뒷받침하는 것이 곧 휴먼 파워이며, 이를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특히 우리나라가 가진 것은 사람밖에 없지 않는가.
21세기 ‘융합문명의 시대’를 이끌 ‘교육 한국’의 문제는 무엇이며 방향은 어디인가? 넓고 얕은 지식을 두루 갖춘 ‘박이천학(博而淺學)형 인재’인가, 아니면 적성과 장기에 선택 집중하는 ‘협이심학(狹而深學)형 인재’인가?
현재의 수능은 전자에 적합한 20세기 대량 생산시대의 평가방식이다. 하지만 거의 30여년 동안 국가가 주관하는 유일한 전국 단위 지필고사로 남다보니 수능이 공정하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평가의 결과는 중요하다. 그런데 수능에서 340점과 350점이 무엇에서 얼마나 차이가 난다는 것인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데, 이 점수만으로 의대를 진학하고, 명문대 합격과 탈락이 결정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한 사람이 수천 명을 상대로 강의를 하여 그 지식을 암기하고, 선행학습으로 문제풀기를 많이 한 학생이 수능점수 순서대로 소위 명문대학에 가는 현실이다. 우리 아이는 고작 다음 학기 수학 선행학습을 하고 있는데, 옆집 아이는 수능 범위까지 다 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불안감에 휩싸인다는 학부모 심리는 평가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평가 체제 속에서 아이들은 중요한 것을 배워야 할 기회를 놓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2,3년 선행학습을 하는 기이한 반교육적 현실을 정책 당국자들은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평가란 관점에 따라 오차가 크고 누가 누구보다 얼마나 뛰어난지 정확히 줄 세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혁신성장을 외치는 이 시대에 미래 교육의 동력은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면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진지한 배움을 포기하게 만드는 선다형 교육은 요즘 회자되는 챗GPT나 검색 엔진에 맡겨 두자.
우리나라의 명문 서울대가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고 하는 시카고대학은 고전을 통독하고 정독하는 교육으로 유명하다. 그 결과 노벨상 수상자는 2022년 기준으로 97명이나 배출하였다. 이 같은 열매는 허친스 총장이 부임하면서 ‘시카고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재학생들은 인문고전 100권을 읽게 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조선의 정약용은 일생동안 500권이라는 저서를 남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의 독서는 결코 서양에 뒤지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구이지학(口耳之學), 귀로 듣고 입으로 나가버리는 교육은 가슴에 남지 않는다.
선다형 시험인 대입에 포박된 사고(思考)는 죽은 생각(死考)이 될 수 있다. 사고력은 문제와 씨름하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학생 각자가 여러 분야에서 각자의 창의성이 나올 수 있게 허용하여야 한다.
해방 후 70년 지속한 ‘구이지학’ ‘박이천학’ 평가지옥에서 미래세대를 놓아주자. 이 세상은 머지않아 감성을 장착한 인공지능 로봇이 거리를 활보할 수준이 될 것이다.
오직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AI가 할 수 없는 인간의 창의력이요 인간존중의 바른 인성, 정직과 신뢰,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나갈 지성을 함께 갖춘 새 시대의 인재상을 그려내는 교육실천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