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바람 광양>몽골 탐방기<3>
관습으로 느끼는 몽골
구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를 시행했던 몽골은 지금도 동구권을 비롯한 중국과 북한을 형제의 나라로 정을 표하며 살고 있다.
아파트에 들어서면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웃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공산 시절의 정보망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말을 들었다. 노인대학을 하면서 그들에게 질문했다.
“공산 시절과 지금과 어느 쪽이 더 살기가 좋으냐?”고. “그때가 좋았지, 노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의외의 대답이었다.
처음 몽골에 갔을 때(2005) 택시를 타고 길을 나선 적이 있다. 통역과 함께 그곳에서 절찬리에 열리는 서커스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제법 깨끗한 편도 2차선을 달리면서 운전수가 내 쪽을 향해 무슨 말을 했다. 통역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한국에도 이렇게 크고 좋은 도로가 있느냐?”고 물었다고 하였다.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잠깐 망설였다.“혹시 TV에서 한국의 거리 모습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TV는 다 거짓말이다!”고 했다.
서커스 극장에 도착했다. 또 그 분이 질문했다.“한국에도 이렇게 큰 서커스 극장이 있느냐?”실내 경기장이 아니라 서커스 전용 극장은 없다고 해야 하나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자 의기양양하게 다음 말이 튀어나왔다.“이 서커스 극장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더 말 할 필요가 없어졌다.‘인민의 낙원’을 굳게 믿으며 굶주림에 익숙해져 시도 때도 없이‘장군님 만세!’를 외치는 북쪽 사람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나도 한 때는 공산당이 빨간 사람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몽골과 우리나라는 많은 것이 닮기도 하고 또는 닮지 않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 새벽에 밖을 나가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하나 있다. 주로 주부들이 우유가 들어 있는 바가지를 들고 숟가락으로 우유를 떠서 사방으로 뿌리는 모습이다.
어렸을 적 나의 어머니도 밥이랑 반찬을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길에 짚을 깔고 정갈하게 놓았던 기억이 있다.
또한 새 차를 구입하거나 차를 타고 먼 길을 나설 때 축원하는 모습도 비슷하다. 그곳에서는 주로 우유를 자동차 네 바퀴에 뿌리며 소원을 빈다.
도로의 교차로나 가장 높은 지점에는‘어워’라는 것이 존재한다. 길을 안내하는 역할과 함께 편하고 무사한 여행을 비는 신성한 지역으로, 우리의 성황당과 비슷하며, 그들은 이곳에 형형색색 헝겊을 걸거나 돈이며 음식물을 바친다. 일종의 제물인 것이다. 그것을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어워’주위를 세 바퀴 돌며, 차량은 그 옆을 지날 때 경적을 세 번 울린다. 우리네‘삼 세 번’의 법칙은 이곳에도 이렇게 존재한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그곳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남녀 모두 정장을 하고 있었다. 평상복을 입고 있던 나 자신이 약간 초라하게 보일 정도였는데 내 차례가 되어 직원 앞에 서려고 다가서다가 멈칫했다. 담당하는 여직원의 손에 큼지막한 동물 뼈가 들려 있었다. 그걸 한 입 베어 물고 나를 맞이하였기 때문이었다. 깨끗하고 가지런하며 엄숙한 분위기의 사무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잠깐 당황하였다.‘먹을 게 없어 고기만 먹는다’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어느 토요일, 몽골에 와서 처음으로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하려고 통역할 학생과 늦은 열 시에 약속을 잡고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5분을 기다렸다. 10분을 기다렸다. 그래도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도 없이…30분을 기다렸다. 1시간을 기다렸다. 12시가 되었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지인에게 말했더니“아마 무슨 일이 있을 겁니다. 그냥 집에 들어가서 쉬세요!”하였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담에 만나서‘왜 안 나왔느냐?’고 묻지 마세요!”그들은 대부분 시계도 없을뿐더러 약속이 있건 없건 당장 눈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부터 감당하기 때문이고, 그걸 문제 삼는 사람은 없단다. 참 기가 막힌 관습이다. 그러고 보니‘코리안 타임’은 그에 비하면 훌륭한 시간 아닌가!
개강하는 날 각자 방학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라 했더니 한 여학생이 대뜸 일어서더니“선생님! 저 임신했어요!” 하자 모든 학생들이 일어나 책상 위에 뛰어오르기도 하고 책상을 두들기기도 하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축하를 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따라 축하해 주었다.‘갓 대학에 들어온 아이가 임신을 했다는데 저렇게들 축하를 해줄까’라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귀한 그 나라의 백성들은 그럴 만도 할 것 같았다. 그럼 아이는 어떻게 키울 거냐고 물으니 “시골 부모님이 키워 주실 거예요!”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우리나라의 6,70년대에는 ‘여자가 배워서 어디다 쓰냐?’는 생각으로 가르치는데 인색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몽골인은‘약한 여자는 배우기라도 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한 학급에 두세 명을 제외하면 모두 여학생인 이유이다.
채소를 먹지 않는 학생들에게 비타민C 제라도 주면 그 신 것을 씹어 먹는 아이들, 약을 주며 하루에 세 번 식사 후에 먹으라고 하면,“왜 한국 사람들은 하루에 반드시 세 끼를 먹어요?”라고 묻는 아이들, 그래도 동아리를 마치고 밤에 집에 도착해서“선생님! 저 이제 집에 갔어요!”라고 하며 무사히 집에 도착했음을 알려 주는 아이들. 살아가는 방식과 관습은 다르지만 선생 입장에서‘잘 갔구나!’라고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그들의 관습은 은근히 따뜻하지 아니한가!<끝>
오학만 어르신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