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27>섬진강변에 6차산업의 빛이 보인다
- 매화랜드 대표 정평기ㆍ정순희 부부 -
2003년 6월 광양YMCA 회관이 중마동에 개관했다. 당시 광양YMCA 이사장 정평기씨의 건물이었지만 건축 용도는 YMCA에서 요구대로 설계했다. 임대였지만 광양YMCA가 안팎으로 자립한 모습을 어엿하게 드러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필자는 다음 달 순천YMCA 사무총장으로 옮겨가게 되어서 든든한 정평기 이사장과 헤어지며 눈물을 머금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시민공동체 활동에 매력을 느낀 정평기(72)씨는 광양YMCA 이사장을 4년 역임하면서 힘차게 봉사했다.‘광양항 활성화 시민행동’상임대표로서 시민들이 버스 7대를 타고 서울로 가서 집회하는 일을 지원했고, 화물연대 파업을 중재하면서 14시간 이어지는 회의의 사회자였다. 지역을 사랑하는 시민사회 지도자의 모습을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포스코 직원으로 사회에 진출한 정평기씨는 광양제철소가 들어서자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새롭게 시작한 사업에서 실패가 이어졌다. 다행히 포스코 납품하는 일이 잘 풀리면서 광양YMCA의 창립에 참여를 했다.
회사 운영과 교회 활동에 더하여 시민운동에 열심을 바치면서 새로운 꿈을 얘기했다. 섬진강변(다압면 염창)에 쉼과 묵상, 어울림과 창작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고, 필자에게도 함께 들어가 살자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10년 동안 집중할 수 있나
2004년 광양시의 친환경 매실농원 지원 사업을 염창마을 이장이 알리며 신청을 권했다. 매화축제 장소를 다원화시키려는 시책이었다. 정평기씨는 자연 속에 매화를 가꾸려는 꿈과 일치하는 사업이라서 서류를 내고 지원을 받았다. 그리하여 농원 개발을 진행하는데 자연 훼손이라는 보도가 있고 몇 가지 실책 때문에 야단을 맞고 지원받은 돈은 시에 반납했다.
자신의 꿈이 오해를 받으며 사회적 비판에 휩쓸렸지만 새로 심은 매실나무가 우거지면 풀어지리라 믿고 일을 추진했다. 비탈진 산에 낸 도로의 축대는 한 번 쌓은 것이 허물어지면 또 쌓으면서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
2005년 살 집을 지어 이사하고 농업인의 생활을 겸하게 되었다. 펜션과 3층 팔각정을 지어 전시장과 행사장도 마련했다. 10년 동안 회사의 모든 수익도 모자라 중마동의 땅까지 팔아 투자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거나 성공하려면 특정한 노력이나 연습을 1만 시간 이상 투입하거나 10년을 매달려야 한다.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할 수 있느냐 하는 것. 정평기씨는 자연을 가꾸고 어울리는 공간을 강하게 원했다.
섬진강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다압면 전체가 매화축제장이 되기를 바랐다. 굴뚝산업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청정한 자연을 활용한 관광산업으로 나아가는 길이 광양의 미래라고 확신했다.
더하여 80억 원에 이르도록 투자할 역량이 있었다. 투자와 수익에 대한 치밀한 계산은 해보지 않고, 개인의 꿈과 지역사회의 미래를 바라보는 사명감으로 10년의 투자 법칙에 빠졌다.
개구리 소리는 오케스트라 아닌가
10년 동안의 투자에 따른 수익은 얼마나 될까? 매실이 지난해에는 25톤 생산되어 1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2014년에는 40톤이 넘게 생산되었으나 4천만 원의 수입에 그쳤다.
매실 가격 폭락으로 매실 따는 인건비가 나오지 않았다. 매실을 따지 못하고 버린 것이 많았다. 가을 들어서 감나무에 열린 감도 매실과 비슷하게 버려야 했다.
부인 정순희(70)씨는 농민의 안타까운 심정을 체득했다. 6월의 햇살을 받아 노랗게 익어도 따주지 못하는 매실을 보며 귀농 5년차의 마음이 노랗게 물들었다.
수확기의 곡물과 채소를 트랙터로 갈아엎는 모습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매실과 감을 생산만 생각했지 팔고 소비할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남편의 뒤치다꺼리하기가 힘들다.
처음 농원을 개발하는 일에 절대 반대였다. 나이 들어가면서 안 하던 농사를 시작하다니. 그런데 남편이 농원 일을 마치고 중마동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에 차가 트럭에 받히는 사고를 당하자 이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와 주인 노릇하다 보니 1주일 내내 아무 곳에도 못나가게 되었다. “여보, 농원 일 사표 낼 테니 받아주세요.”
요즈음 들어 남편 정평기 씨에게 간청을 했지만‘사표 낼 곳이 어디 있나?’ 하는 응답만 들었다. 다행인 것은 펜션을 전국의 목사님들께서 이용해 주셔서 주의 종을 도 많이 섬기라는 사명으로 여긴다.
처음 이사 왔을 때, 남편은 정기적으로 출장을 나가니 혼자서 외딴집에 있는 무서움이 컸다. 그래도 자연은 마음에 평안을 주었고 힐링의 현장이었다. 자연이 주는 벅찬 감동을 그 때 그 때 낙서처럼 쓰는 버릇도 생겼다.
디자인을 공부한 딸이 써 놓은 시들을 모아 책을 만들었다. 같은 글이지만 다른 디자인으로 만든 3권의 시집, 제목은 『어느 날 문득』이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오케스트라로 여기는 정순희 씨는 어느덧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은빛 물결 속에서/은어가 뛰어 노는 섬진강//밤하늘을 수놓은 별빛은/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이고/산허리에 걸려 있는 초승달은/내일을 약속하며 작별인사를 합니다.”(『어느 날 문득』에 실린‘섬진강 이야기’ 중에서)
굴뚝산업이 아닌 6차산업이 희망
정평기씨는 팔각정 2층에 세계 80개국을 여행하며 모은 기념품을 전시하고 있다. 도자기는 포항에 근무하면서 포스코 본사 로비의 전시품과 경주의 도자기를 접할 때부터 관심을 쏟았다. 광양의 꽃인 매화 그려진 도자기를 구하러 강진, 여주, 이천을 찾아가고 일본과 중국의 작품도 모았다.
광주 비엔날레에 북한의 공예품이 전시되었을 때 공훈예술가 작품 6점을 구입했다. 그 비엔날레가 끝나고 3년 뒤, 북한관 운영자가 전화를 해서 팔리지 않은 북한의 도자기와 세공품을 보관하고 있다고 알렸다. 그것까지 한 트럭분을 구입해 놓았다.
팔각정은 그러한 작품들을 섬진강의 경관과 더불어 감상할 수 있다. 밤나무를 베어낸 9천 평에 편백나무 500그루를 심었고 더 많이 가꾸어 치유의 숲을 만들려 한다. 매실 진액를 생산하고 감을 건시와 곶감으로 만들고 있는데, 매실와인을 제조하여 보관하는 땅굴도 만들고 싶다. 매화축제 때 매화랜드의 하루 방문객은 500명 정도다.
주차장과 화장실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광양시에서 손님을 데려와 구경은 시키면서도 그런 지원은 모른 체 하다 이제야 관심을 가진다. 섬진강변으로 자전거 도로가 마련되었고, 하동 악양으로 건너는 다리가 하나 더 건설되면 접근성이 더욱 좋아질 것이다.
매화랜드를 처음 시작할 때 관광농원으로 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펜션으로 쓸 다가구 주택 12채를 지었지만 200평이 넘는다고 허가가 되지 않았다. 작은 펜션은 딸이 들어와서 운영한다. 토지가‘농업관리지역’이어서 제한이 많으므로‘계획관리지역’으로 도시계획이 변경되기를 바란다.
나이는 들어 일하기가 어려운데 일꾼들은 가까이에서 구하기 힘든 것이 문제다. 농장의 노예가 되어 맘 편할 날이 없다. 일에 몸서리가 나고 온 가족을 고생시켜 미안하기 짝이 없다. 매화랜드에서 살고 싶으나 농원의 운영은 별도로 맡기고 싶다.
지난 10년은 개발하는 시기였고 앞으로 10년은 관광산업으로 도약할 시기다. 지역의 자연과 생산품과 관광객이 공동체로 어울리는 비전이 보인다. 매화랜드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6차 산업의 현장이다.
1차 농산물을 생산하여 2차 가공업이 이뤄지고, 판매와 관광서비스로 이어지는 3차 산업이 복합되어 높은 부가가치를 발생시키는 것이 이른바 6차 산업이다. 섬진강변은 잘만 가꾸면 나폴리 못지않은 관광지가 될 요소를 갖췄다. 그만큼 할 일도 많은데, 답답하다는 정평기 씨. 그의 뜻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까?
박두규 광양문화연구회 전라남도청소년미래재단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