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을 보내는 단상

2006-09-13     광양신문
나기 힘든 여름이었다. 7월 들어 장맛비로 은근슬쩍 눈치 보는가 싶더니 8월엔 제 본성을 드러냈다. 사람의 나약한 데를 건드리기라도 하듯 더위는 끝까지 갔다.

한낮이야 더워야 한다 치고 쉬지 않고 엄습해오는 열대야엔 두 손 들었다. 장마로 누기가 차서 축축할 땐 좍좍 내리꽂는 장대비를 보노라면 눈에 생기라도 도는데, 더위엔 허덕댈 수밖에 없다. 진을 빼놓은 뒷날 아침, 잠 설친 채로 맞는 아침은 정신이 흐리터분하다. 지난여름 우리는 거의 그런 아침을 보냈다.

하지만 여름 더위를 미워할 것만은 아니다. 더워야 여름이다. 여름의 8할은 햇빛이요 햇볕이다.

내리쬐는 빛, 스미는 볕이 생명을 키운다. 여름의 상징적 에너지다. 여름은 제게 주어진 몫을 다하기 위해 덥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성장을 가을의 완성으로 배턴을 넘겨주는 계절―여름은 그래서 위대하다.

그렇다면 고통스럽다고 눈 흘기던 더위도 인식의 대상 밖의 것이 아니다. 힘들더라도 참아가며 더위에 박수라도 보냈어야 했다. 더위도 자연 현상으로 자체가 이치요 섭리임을 일깨워준 것이다.

이제 지겹던 여름의 무더위도 물러앉았다. 올 때 온다고 안 한 것처럼 갈 때도  가노라 손 흔들며 떠나갈 더위가 아니다. 지금쯤 북적거리던 해수욕장도 텅 비어 정적 속에 곯은 배를 쓸어내릴 것이다. 

8월의 끝이다. 끝이 안 보일 것만 같던 여름이 막을 내리고 있다. 아침저녁 몸에 와 닿는 선선한 무슨 기운, 이걸 가을의 숨결이라 하는가. 며칠 전부터 사람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공기가 달라졌다.

맛도 낌새도 빛깔도 전과 다르다. 무엇보다 죽부인같이 끌어안고 살던 선풍기와 에어컨에서 놓여나게 되어 살갑고 개운하다. 불쑥불쑥 몸이 쾌재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정녕 8월이 계절의 무대 밖으로 사라지고 있다. 보라, 저 많은 생명들의 손 흔듦을. 수많은 생명들의 환호 속에, 그러나 자국 하나 남기지 않은 흔연한 퇴장이다. 8월이 떠나간 자락엔 생명의 성숙이 결실로 가시화되리라.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가을의 축제로 바꿔놓는 이 대지는 얼마나 여무지고 은혜로운가.

매미도 울음을 그쳤다. 그만하면 득음(得音)했으리라. 텃밭의 고추가 빨갛게 익고 지척의 앞바다도 허리 늘어지게 몸뚱어리 펴 벽공과 쪽빛을 겨룰 채비에 여념이 없다.

앞마당의 석류도 속살 내놓아 붉은 구슬 됫박으로 부어놓을 것이고, 얼마 전 불당에서 밖으로 옮겨 봉안한 우리 절 석불님도 가을 하늘 아래 고운 눈길 지으시리라.

그뿐이랴. 두 돌 지나도록 말 제대로 안 터지는 우리 지용이 말 대신 짓이라도 현란해졌으면…. 8월의 끝에 서서 상념의 물꼬 한 번 터본다.

‘여름 내내 울었으면/ 매미는 그 새 소리꾼 다 됐을 것/ 텃밭에서 벌레에 쫓기던고추/ 열댓 번 속 뒤집혀 얼굴 빨개졌을 것/ 태풍에 뒤척이던 앞바다/ 멍든 몸뚱이 늘어져 펑퍼짐했을 것/ 퉁퉁 땡볕에 부어오른 석류 속살 터져/ 홍 구슬 한 됫박씩 쏟아놨을 것/ 하늘 아래 한둔하는 정혜사 석불님/ 한 숨 돌렸다고 눈길 고와지셨을 것/ 두 돌 넘게 말 안 터지는 우리 지용이/ 눈 짓 손짓, 짓의 말 만발할 것// 베갯맡/ 풀벌레 소리/ 웬 음악회인가'  (자작시 ‘팔월의 날 전문)

여름이 무릎 털고 떠나자 가을이 몸을 부려 거적 펴고 앉는다. 계절의 분기점이다. 아스라이 지나온 여름의 뒤꼍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눈앞 가을풍경으로 오버랩 되는 게 아닌가.

여름이 가져다준 성장의 자리엔 나락으로 가득 채워야 할 가을이 문을 열어놓고 기다린다. 

한때 휘둘렸던 여름에서 풀려나는 계절의 첨병, 8월의 끝이다. 아름다운 가을동화라도 하나 엮어가며 가을의 곳간에 독자들에게 드릴 무얼 좀 쌓아야 겠다. 무슨 낟알 하나, 글 한 줄이라도.
 

입력 : 2006년 08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