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3.1정신 지자체가 나서라
잊혀져 가는 3.1정신 지자체가 나서라
  • 귀여운짱구
  • 승인 2007.03.08 09:42
  • 호수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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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식 열어 지역 선열들의 희생 기려야
지난 1일은 제88주년 3.1절이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우리지역 3.1운동가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의 암흑한 시절에 주권 없는 국민의 설움을 벗어나고자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혹독한 수감생활을 견디다 못해 그 후유증으로 죽기도 했다. 본지는 내년부터 광양시가 3.1절을 맞아 기념식을 갖기를 바라며 우리지역 3.1운동가와 유적지를 되새겨 본다.
 
▲3.1운동 독립운동가(독립기념관 자료)
 
△정 성 련(鄭星鍊. 1879~1923. 3. 14)
옥룡면 추동출신. 1919년 3월 27일 광양군 광양읍(光陽邑) 장날에 단독으로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계획하여, 태극기 3매를 만들어 거사일인 장날 장터로 나가서 수백 명의 장꾼 앞에서 태극기를 장대에 메어 머리 위에 높이 들고 흔들며, '만세 만세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다가 체포됐다.
그는 같은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出典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326.
 
△정 귀 인(鄭貴仁. 1885. 1. 12~1946. 3. 29)
옥룡면 죽림출신. 광양군 인덕면(仁德面)에서 1919년 4월 4일 서경식(徐璟植)·박용래(朴龍來) 등과 함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큰 기를 만들고 태극기를 준비하여, 광양군 광양면(光陽面) 읍내리(邑內里)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그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出典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321.
 
△임 태 일(任泰馹. 1899. 9. 9~1959. 11. 5)
진월면 송현출신. 1919년 4월 15일 광양군 진월면(津月面) 송금리(松琴里)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 서당 학생들과 같이 태극기를 제작하며 주민들에게 통문을 보내는 등, 준비를 갖추고 이날 진월면 선소리(船所里) 무적도(無敵島)에서 시회(詩會)를 가장(假裝)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려다가 일본군헌병에 체포됐다.
그 해 5월 8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出典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p.302~303.
 
△서 경 식(徐璟植. 1886. 4. 8~1938. 2. 21 이명 : 瓊植)
옥룡 산본출신. 1919년 4월 4일 광양군 인덕면(仁德面)에서 박용래(朴龍來)·정귀인(鄭貴仁) 등과 함께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그와 동지들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와 태극기 등을 만들어 거사준비를 갖추고 광양군 광양면(光陽面) 읍내리(邑內里)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시위를 펴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그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出典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p.166~167.
 
△박 용 수(朴瑢洙. 1901. 12. 14~1985. 2. 4 이명 : 亨洙·萬權)
1919년 3월 27일 광양군 인덕면(仁德面)의 만세운동에 이어 제2차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같은 해 3월 29일 동료인 김영호(金永鎬)·김석용(金錫瑢)·이재갑(李在甲) 등과 함께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와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 군중을 규합하기 위한 격문을 작성하여 김태훈(金泰勳)·김태성(金太星) 등에게 건네주고 각 마을마다 붙이게 하여 거사의 취지를 널리 전파하려다가 일군 헌병에게 발각되어 체포됐다.
그 해 5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出典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144.
 
△박 용 래(朴龍來. 1894~1951. 2. 6)
옥룡면 개현출신. 1919년 4월 4일 광양군 인덕면(仁德面)에서 서경식(徐璟植)·정귀인(鄭貴仁)등과 함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 거사를 위해서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만들고 태극기를 준비한 후 광양군 광양면(光陽面) 읍내리(邑內里)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을 규합,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出典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143.
 
△김 영 호(金永鎬. 1904. 4. 23~이명 : 正基)
광양읍 도월리 월평출신. 1919년 3월 27일 광양군 인덕면(仁德面)의 독립만세운동에 이어 3월 29일 제2차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박용수(朴瑢洙)·김석용(金錫瑢) 등과 함께 이재갑(李在甲)의 집에 모여 장날을 이용,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한 후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와 태극기를 만들고 다수 군중을 모으는 격문을 작성하여 김태훈(金泰勳)·김태성(金太星) 등으로 하여금 각 마을마다 붙이도록 하여 거사의 취지를 널리 전파하려다가 일군 헌병에게 발각되어 체포됐다.
그 해 5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80.
 
△김 석 용(金錫瑢. 1894. 2. 11~1955. 4. 12)
1919년 4월 1일 광양군 광양읍(光陽邑)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김상후(金商厚) 등과 같이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써서 곳곳에 붙이는 한편 주민들을 규합하여 다수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같은 해 5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공소했으나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 상 후(金尙厚. 1870. 5. 10~1944. 9. 22)
옥룡면 상평출신. 1919년 4월 1일 광양군 광양읍(光陽邑)에서 장날을 이용, 김석용(金錫瑢)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다수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음식점에서 30여 명의 군중에게 독립만세운동의 당위성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됐다.
같은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出典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p.67.
 
△진 신 애(陳信愛. 1900. 7. 3~1930. 2. 23)
1919년 당시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光州郡 孝泉面 楊林里)에 거주하면서 수피아(須彼亞)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이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도 이미 2.8독립선언서가 광주지방의 청년들에게 전달되었으며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던 김 철(金鐵)과 서울 유학생 최정두(崔正斗) 등이 1919년 3월 5일 광주로 돌아오면서부터 곧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이 세워지고 준비가 진행되었다.

그는 3월 10일 박애순(朴愛順) 교사와 함께 기숙중인 여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수피아여학생들을 이끌고 광주 장터로 나아가서 모여든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이처럼 선두에 서서 학생들을 지휘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그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出典 :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9卷, 國家報勳處, 1991年, p.472.
 
▲3.1운동 유적지
 
 
△광양5의사 3.1운동기념비(光陽五義士三一運動紀念碑)
소재지 :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172
건립기관 : 광양향교, 관리기관 : 광양향교
시설규모 높이 2m ※ 지방문화재 0809-21-0005호 광양5의사 3.1운동기념비(光陽五義士三一運動紀念碑) 광양읍 독립만세운동에 불을 당긴 5의사(徐璟植, 鄭龍鉉, 鄭吉和, 金商厚, 朴龍來)의 영령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5의사비를 건립하였다.
 
△광양7의사 3·1운동기념비(光陽七義士三一運動紀念碑)
소재지 :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 272-2
건립기관 : 옥룡면민, 관리기관 : 광양시
시설규모 높이 2.6m
광양7의사 3.1운동기념비(光陽七義士三一運動紀念碑)
광양 지역의 3.1운동에 참여한 이기수(1902년생)·김영석(1899년생)·최준수(1900년생)·서성식(1900년생)·서찬식(1900년생)·박병원(1902년생)·나종길(1903년생) 등 7명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이들은 옥룡면 운평리에 있는 서당 견룡재(見龍齋)의 학생으로 "선배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왜적들에게 끌려갔는데 우리가 어찌 앉아서 공부만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튿날인 4월 2일에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독립만세를 소리높여 부르며 읍내를 향하여 가다가 도중 적측에 검속당하여 심한 폭행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들 소년들은 어른 못지 않게 적의 폭력에 대항해 항쟁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16세의 소년 이기수는 "기어 다니는 어린애도 어머니를 부를 줄 안다. 내 비록 어릴지라도 내 나라를 위하여 국치(國恥)를 씻고자 한 것이다.
너희들의 법이란걸 내 어찌 겁내리오" 하면서, 적의 공갈협박에 태연자약했으며, 같은 16세의 소년 김영석은, "남의 나라를 강탈한 강도놈들이 무슨 잔소린가? 내 한 몸이 두동강이가 되어도 마음은 한 마음 뿐이라"고 항변하여 백절불굴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의사하동정공성연 3·1운동기념비(義士河東鄭公星鍊三一運動紀念碑)
소재지: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건립기관 : 유족, 관리기관 : 유족
시설규모 높이 2.7m
의사하동정공성연 3·1운동기념비(義士河東鄭公星鍊三一運動紀念碑)
정성연(1878∼1923·용현)은 1919년 3월 27일 광양읍 장터에서 미리 제작하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가 1919년 4월 26일 징역 8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