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중 설립한 황호일 선생 조부, 광양 빛낸‘삼대 애국 집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광양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진상출신 황병욱 선생을 조명하고 독립유공자에 추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황병욱 선생은 본지 795호(1.21일자) 16면에 실린 1919년 광양의 3.1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김상후 의사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군 군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이 같은 내용은 김상후 의사의 4대손인 김형택 씨가 지난 23일, 대종교 1대 교주 나철(1863~1916)선생의 서간문과 순천부사를 지낸 김윤식(1835~1922)선생의 운양록 등 귀중한 자료를 선생의 4대손인 황상보(64)씨에게 보여주면서 확인됐다.
황병욱 선생이 독립군 군자금을 댔다는 사실은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김응백 의사(의병, 진상 어치,1995년 독립장추서)가 1908년 12월부터 1910년 1월까지 진상면 황병욱 선생의 집에 군자금을 가지러 갔다가 체포됐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 내용은 김응백 의사가 진주교도소에서 받은 판결문에 나와 있다)
황병욱 선생은 1860년 생으로 영광세관에 재직하던 중 1910년 나라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석재산을 정리하고 그해 장남 황종현과 만주로 건너가 약국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가르쳤고 독립군 군자금을 댄 것으로 전해진다.
황병욱 선생은 진상중학교를 세운 황호일 선생의 조부이고 황호일 선생은 황상보 씨의 조부다.
황상보 씨는“황호일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조선아이들을 모아서 공부를 가르쳤다고 들었다. 진상중학교를 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라며“고조부 황병욱 할아버지와 증조부 황종현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기록이나 자료들이 전무하다. 황호일 할아버지는 두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진상에 돌아와서 학교를 세웠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황상보 씨는 1924년 65세로 돌아가신 황병욱 할아버지와 1926년 45세에 돌아가신 황종현 할아버지의 유해를 당시 23살이던 황호일 할아버지가 알류미늄 관에 넣어서 모셔왔다고 말했다.
황상보 씨는“1956년 조병옥·신익희 선생이 신간회 일로 광양에 왔을 때 김상후 의사와 황병욱 할아버지를 독립유공자에 추서해야 한다고 했지만‘나라가 선비를 만들어줬는데 선비가 나라를 위해 애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며“황호일 할아버지가 고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할아버지의 그런 유지도 있었지만 자료도 전무해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황 씨는“할아버지를 유공자에 추서하기 위해 중학생 때부터 노력한 젊은 친구를 보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귀한 자료를 찾아줘서 고맙다”고 김형택 씨를 고마워했다.
김형택 씨는“황병욱 할아버지는 김상후 할아버지의 광양 3.1운동 거사 소식을 듣고 유림들과 편지교류를 통해 인원을 모으는데 큰 역할을 하셨을 뿐 만 아니라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자금을 지원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더 치열하게 하신 걸로 안다”며“어떻게 보면 김상후 할아버지보다 황병욱 할아버지가 더 훌륭한 일을 하셨다. 더 정확한 자료와 근거를 찾아서 황병욱 할아버지의 훌륭한 뜻이 조명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