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사업단 시민이야기 수상작>
<문화도시사업단 시민이야기 수상작>
  • 광양뉴스
  • 승인 2018.01.26 17:54
  • 호수 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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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남수 옥룡면 용곡리

 광양 오일장, 아버지의 전대

 

낙엽의 무리들이 거리를 에워싼다. 뒹굴고 흩어지고 더러는 뭍사람들의 발길에 채이고. 새봄, 가지 끝에 새순을 틔우려고 산고를 치루고 무더운 여름 누군가의 그늘 막과  쉼터가 되어준 나뭇잎들, 이젠 그 소임을 다하고 거룩한 장송곡을 울린다.

일흔의 나이를 훌쩍 지나오면서 낙엽의 무리들을 보노라니 쓸쓸하기도 하지만 거룩하기 그지없다. 나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 떠난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런저런 생각들로 가득한 겨울의 길목 오늘도 광양읍 노인복지관 중국어 수강을 듣고 유당공원 벤치에 앉았다.

복지관 수강을 들으러 올 때마다 유당공원을 쳐다보면 지나온 시간들이 흑백 필름처럼 스쳐간다. 유당공원은 그 시절 우시장이 활발하게 형성되었던 장소였다. 그래서 그럴까? 내 귓전에 소들의 울음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온다.

어느 겨울밤이었다. 백운산에서 불어오는 칼날 같은 매서운 바람이 문풍지를 훑고 어머니는 가마솥에 여물을 안이고 장작불을 지피셨다. 아래채 소 막사에서는 짚으로 엮은 거죽들 사이로 소들의 울음소리가 요란스럽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먹이를 달라는 소들의 신호였다.

어머니의 바쁜 손놀림 위로 가마솥엔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부지깽이와 함께 장단을 맞춘 어머니의 푸념이 시작되었다.

“그놈의 술 때문에 소 판돈 다 날리고 비럭깨 3마지기 논 다 팔아 없애고 자식들 공부는 뭘로 시키고 믹일라고~~ 저놈의 인간 오늘도 주막에 있는 갑그마. 휴~”

어머니의 긴 한숨 소리가 아궁이에 장작불만큼이나 절정을 오를 때쯤 아버지는 막걸리 한 사발의 취기에 갈지를 저으며 들어오셨다. 그날도 읍내에 광양오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소 장사를 하셨다. 인근 하동장이나 옥곡장 광양장 등지에서 송아지를 사서 한 두 달 집에서 기르다가 인근 장에 내다팔기도 하고 장날 우시장에서 중개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명 소 장사 송센이 우리 아버지 직업이다. 우리 마을은 여산 송 씨 씨족들이 집터를 잡고 살고 있다.

당숙 벌 되는 아재는 전문적으로 소 장사를 하는 소 장사 큰 송센이라면 우리 아버지는 당숙 밑에서 소자본으로 소 장사를 하는 작은 소 장사 송센인 셈이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15리 길을 소를 몰고 걸어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 새벽 종소리가 울리면 일어나 장을 볼 채비를 하셨다. 그 시절 소는 집집마다 없어서는 안 될 재산목록 1호였다.

농기구 역할과 교통수단으로서 또는 송아지를 길러 다시 송아지를 낳으면 든든한 수입원으로서 역할이 컸기 때문에 건실한 소를 사고파는 여부에 따라 가정 경제에 커다란 자본이 되었다. 그래서 소 장사들의 역할이 컸다. 지금 같으면 딜러인 셈이다.

그날도 이른 새벽 싸리문 밖 당숙의 헛기침소리와 함께“어이 동생 일어 났능가?”당숙의 아침인사가 떨어지기 바쁘게 아버지는 어김없이 두어 달 집에서 기른 소를 몰고 광양 오일장으로 내려가셨다. 두꺼운 겨울 두루마기 속에 전대를 묶고 소의 워낭소리를 따라 ….

겨울 오일장은 낮이 짧기 때문에 파장도 빠르다. 그날 아버지는 아침 일찍 소를 비싸게 팔고 기분이 좋으셔서 오일장 옆 아버지가 잘 다니셨던 주막으로 가셨다.

두루마기를 벗고 술잔을 건아하게 돌리며 황진이와 이태백의 시조 가락에 풍월을 읊으시며 겨울밤이 빨리 오는 줄 모르게 즐기셨으리라. 막걸리 잔이 건아하면 읊으셨던 우리 아버지 풍월은 동네가 다 아는 풍월이다.

특히, 이태백의 시조가락은 우리 아버지가 제일 잘 읊으셨던 시조였다. 한시를 즐겨 쓰고 읊으셨던 아버지는 멋쟁이였고 낭만파였다. 소 판 돈과 흥정한 돈을 모두 전대에 넣어 허리춤에 묶었지만 취기가 극에 달한 아버지의 전대를 누군가 절도해 가버린 것이다.

그 시절 광양오일장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 장돌뱅이들이 진을 쳤던 아주 큰 장이었다. 우시장은 많은 소들이 집결해 있었고 장마당은 다양한 물물교환의 장소였으며 지역 경제의 한 획을 그었던 곳이었다.

아버지가 도둑맞은 전대에는 우리 가족의 생계와 장사 밑천으로 팔았던 비럭깨 논 서마지기 값이 다 들어 있었다. 뒤늦게 전대를 잃어버린 걸 알았던 아버지는 정신이 버쩍 들어 찾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장은 파장이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보부상들과 장돌뱅이들도 다 떠난 뒤였다. 그렇게 우리집은 몰락의 늪지대를 걷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