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읍의 8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팍팍한 농·산촌의 모습을 겨우 탈피한 작고도 정겨운, 소박하면서도 곳곳에 삶의 진솔한 향기가 꿈틀거리는 아늑하고 작은 읍내였다. 내가 초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광양읍내를 운행하던 택시는 겨우 3〜4대에 불과했으니, 집 앞 도로에서 마음껏 자전거를 타도, 친구와 함께 눈을 감고 뒤로 걸으면서 어디까지 왔나를 점치곤 해도 차량이나 교통흐름에 전혀 문제가 없는 그런 여유가 있는 곳이었다.
칼라TV가 보급된 지 얼마 되지 않는 터라 집집마다 화질이 썩 좋지 않은 14인치 소형 티비 앞에서 밤늦도록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고, 각종 정보나 매체, 모바일과의 연결이 전무한 시대적 상황과 열악한 교육 환경의 부재에서 동화책 몇 권, 소설책과 만화책 몇 질로 유아기적 견문을 넓혀왔던 우리들에게 일년에 한 두 번씩 주어지는 ‘단체영화 상영’이라는 파격적인 기회는 또 다른 신문물을 받아들인 듯 흥분되고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영화는 주로 눈물과 웃음이 섞인 애정 신파극이나 코미디물, 또는 권선징악에 바탕을 둔 단순하고도 감성을 자극하는 교육적 내용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는데 영화가 한 번 상영될 무렵이면 제일극장이 소재해 있던 읍내 시계탑 사거리가 광양 5일장만큼이나 흥성거렸다.
영화 시작 한 달여 전부터 읍내 구석구석은 물론 각 면단위 벽보에까지 미리 영화포스터가 붙여지고, 이어 확성기를 단 소형차가 영화 홍보 차 읍내를 활주하면 언니 오빠들의 일정표가 달라지곤 했다.
각 급 학교에서는 학생 단체 관람을 시켜 주기도 했고, 변두리 면단위에서까지도 남녀노소를 불문 하루 두세 번 운행하는 콩나물 버스를 타고 영화를 보러 오기도 했으니 그 만큼 뒤떨어진 문화에의 향유를 갈망하던 시기였으리라.
당시 우리 집은 읍내 버스정류장 부근(현, 광양역사문화관 앞)에 있는 제일주유소 앞이었고, 엄마가 조그마한 간이음식점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영화상영이 있는 날의 집 앞 도로는 가히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읍내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목성리 제일극장까지 가는 약 300미터 가량의 도로는 그야말로 오직 영화를 보러 내려가는 사람들의 행렬이었는데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형형색색의 인간 띠 같았다고나 할까.
그 무리 중에는 예외 없이 광양의 유명 거리인 이었던‘재만이’아저씨가 있었고, 마치 그들을 호위하듯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정리를 해주기까지 했으니 유독이도 오래 기억에 남는 나만의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극장 안팎에는 비닐로 영세하게 가림막을 치고 앉은‘뽑기나 띄기’, ‘호떡’,‘아이스께끼’장사들이 있었는데 그들 앞에는 딱 그 나이와 수준에 맞는 제각각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곤 했다.
극장 내부에는 소위 지역에서 껌 꽤나 씹는다는 어깨파들은 물론, 건들건들한 읍내 농고생 오빠들, 새초롬하게 청바지나 핫팬츠를 입고 나온 변장 여고생 언니들이 영화 상영 목적 외 만남의 장이 이루어지곤 했는데 그들 주변으로 간간히 순경아저씨들이 지나가고, 또 각 학교에서 나온 생활지도 선생님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번득이기도 했다는 것을 그때는 어려서 영문을 몰랐지만 커가면서 어렴풋이“그 때 그랬었구나~!”하고 끄덕여지는 것이다. 그러저러 두세 시간의 영화상영이 끝나면 다시 제일극장에서부터 최약국, 제일주유소를 지나 버스정류장까지, 나아가 개머리(광양여고)까지 이어지는 소위 신작로의 밤길은 귀가하는 사람들의 행렬과 긴 그림자들로 다시 북적이곤 했으니…
시대가, 나라가, 지역이 두루 어렵고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 소도시 작은 읍내의‘극장’이라는 공간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저마다의 기억에 추억 한 자락씩을 엮어놓게 했으니‘광양 제일극장’은 우리 광양 사람들의 문화의 창고로 각인되기에 충분한 것이리라.
유영미 광양시청 농업지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