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읍권 역사문화 장소 시민이야기 공모작
광양읍권 역사문화 장소 시민이야기 공모작
  • 광양뉴스
  • 승인 2018.01.12 18:32
  • 호수 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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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첫 스크린으로의 초대 ‘광양 제일극장’

광양읍의 8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팍팍한 농·산촌의 모습을 겨우 탈피한 작고도 정겨운, 소박하면서도 곳곳에 삶의 진솔한 향기가 꿈틀거리는 아늑하고 작은 읍내였다. 내가 초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광양읍내를 운행하던 택시는 겨우 3〜4대에 불과했으니, 집 앞 도로에서 마음껏 자전거를 타도, 친구와 함께 눈을 감고 뒤로 걸으면서 어디까지 왔나를 점치곤 해도 차량이나 교통흐름에 전혀 문제가 없는 그런 여유가 있는 곳이었다.

칼라TV가 보급된 지 얼마 되지 않는 터라 집집마다 화질이 썩 좋지 않은 14인치 소형 티비 앞에서 밤늦도록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고, 각종 정보나 매체, 모바일과의 연결이 전무한 시대적 상황과 열악한 교육  환경의 부재에서 동화책 몇 권, 소설책과 만화책 몇 질로 유아기적 견문을 넓혀왔던 우리들에게 일년에 한 두 번씩 주어지는 ‘단체영화 상영’이라는 파격적인 기회는 또 다른 신문물을 받아들인 듯 흥분되고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영화는 주로 눈물과 웃음이 섞인 애정 신파극이나 코미디물, 또는 권선징악에 바탕을 둔 단순하고도 감성을 자극하는 교육적 내용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는데 영화가 한 번 상영될 무렵이면 제일극장이 소재해 있던 읍내 시계탑 사거리가 광양 5일장만큼이나 흥성거렸다.

영화 시작 한 달여 전부터 읍내 구석구석은 물론 각 면단위 벽보에까지 미리 영화포스터가 붙여지고, 이어 확성기를 단 소형차가 영화  홍보 차 읍내를 활주하면 언니 오빠들의 일정표가 달라지곤 했다.

각 급 학교에서는 학생 단체 관람을 시켜 주기도 했고, 변두리 면단위에서까지도 남녀노소를 불문 하루 두세 번 운행하는 콩나물 버스를 타고 영화를 보러 오기도 했으니 그 만큼 뒤떨어진 문화에의 향유를  갈망하던 시기였으리라.

당시 우리 집은 읍내 버스정류장 부근(현, 광양역사문화관 앞)에 있는 제일주유소 앞이었고, 엄마가 조그마한 간이음식점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영화상영이 있는 날의 집 앞 도로는 가히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읍내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목성리 제일극장까지 가는 약 300미터 가량의 도로는 그야말로 오직 영화를 보러 내려가는 사람들의 행렬이었는데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형형색색의 인간 띠 같았다고나 할까.

그 무리 중에는 예외 없이 광양의 유명 거리인 이었던‘재만이’아저씨가 있었고, 마치 그들을 호위하듯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정리를 해주기까지 했으니 유독이도 오래 기억에 남는 나만의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극장 안팎에는 비닐로 영세하게 가림막을 치고 앉은‘뽑기나 띄기’, ‘호떡’,‘아이스께끼’장사들이 있었는데 그들 앞에는 딱 그 나이와 수준에 맞는 제각각의 사람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곤 했다.

극장 내부에는 소위 지역에서 껌 꽤나 씹는다는 어깨파들은 물론, 건들건들한 읍내 농고생 오빠들, 새초롬하게 청바지나 핫팬츠를 입고 나온 변장 여고생 언니들이 영화 상영 목적 외 만남의 장이 이루어지곤 했는데 그들 주변으로 간간히 순경아저씨들이 지나가고, 또 각 학교에서 나온 생활지도 선생님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번득이기도 했다는 것을 그때는 어려서 영문을 몰랐지만 커가면서 어렴풋이“그 때 그랬었구나~!”하고 끄덕여지는 것이다. 그러저러 두세 시간의 영화상영이 끝나면 다시 제일극장에서부터 최약국, 제일주유소를 지나 버스정류장까지, 나아가 개머리(광양여고)까지 이어지는 소위 신작로의 밤길은 귀가하는 사람들의 행렬과 긴 그림자들로 다시 북적이곤 했으니…

시대가, 나라가, 지역이 두루 어렵고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 소도시 작은 읍내의‘극장’이라는 공간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저마다의 기억에 추억 한 자락씩을 엮어놓게 했으니‘광양 제일극장’은 우리 광양 사람들의 문화의 창고로 각인되기에 충분한 것이리라.      

유영미 광양시청 농업지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