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읍권 역사문화 장소 시민이야기 최우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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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뉴스
  • 승인 2017.12.08 19:06
  • 호수 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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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숲 노거수 이야기 (윤덕현•광양읍 예구 2길)

1. 나이

 

나는 조선시대 박 씨 성을 가진 현감이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심은 노거수다. 어느 날 누군가 나의 나이에 대해 조사를 하러 왔는데 사실 난 내 나이를 잘 모른다. 왜냐면 2백 살이 넘어가면서 셈을 하지 않았으니깐. 조사하러 온 사람이 분주하게 나를 조사하고 떠나간 후 나는 혼자 곰곰이 생각을 했다. 사람이 만약 몇 백년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나이를 지금처럼 한 살 한 살 셈을 할까? 아니면 나처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백 살은 족히 됐을 것이오.’하고 이야기할까? 이 보잘 것 없는 고민을 1년이나 옆의 당산목에게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아마도 후자처럼 이야기하리라 생각을 내렸다.

나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과정에 단지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0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 10년 후의 나는 순간순간의 자연의 섭리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자기이다. 나름 뿌듯하게 당산목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순간 당산목이 말했다.

“사람은 몇백 년을 못 사는데 왜 굳이 그 고민을 1년이나 한 거야?”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2. 업(業)

 

나는 평생을 이곳에 뿌리내려 거리가 바뀌고, 건물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보며 살아왔다. 나는 그대로인데 내 주위가 변하면서 사실 나는 실업을 한 상태이다. 흔히들 나무에게 있어서 업을 잃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과학적인 상식으로는 공기를 배출할 능력을 잃었을 때에나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 가끔 슬픈 목소리로 옆의 고목들에게 실업에 대해 얘기하면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까치집을 올해 몇 개 지었는지, 바둑 두러 온 노인들의 승패같이 시시콜콜한 말만 둘이서 신나게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이렇게 나의 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옛날 박 씨 성을 가진 현감이 나를 이곳에 심으면서 했던 부탁을 기억해서다. 방풍! 다른 나무랑 다르게 그게 또 다른 나의 업이었다. 하지만 원래 바다였던 곳이 사람에 의해 흙으로 덮혀졌고, 내 키보다 높은 건물들이 하나둘 생기고 굳이 내가 바람을 막을 이유는 없어지면서 입버릇처럼 이런 얘기를 꺼낸다.

“사람들이 말하는 실업자랑 다를 게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 한없이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따로 품삯을 받는 일도 없거니와 따로 바람을 막기 위해 애쓴 기억도 없기 때문에 아쉬울 건 없다. 다만 건물과 도로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바람을 느끼며 쓸쓸해할 뿐.

 

3. 김 씨 노인

 

매일 나의 그늘 밑에 찾아와서 인사를 걸어주는 한 노인이 있다. 김 씨 성을 가진 아무개인데 작년에 비해 눈에 띄게 기침을 하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김 씨 노인은 작년만 하더라도 5일장이 서면 부인과 함께 한손 가득 장을 보고 내 발아래 나무의자에 걸쳐 앉아 쉬다 가곤 했었다. 어째서인지 혼자 오는 날이 많아지더니 올여름이 지나고는 아예 혼자 오고 있다. 내가 나무가 아니었다면 김 씨 노인 집에 찾아가서 같이 말동무라도 해주고 싶으나 실없는 말은 잘 하는 나이지만 이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을. 

 김 노인은 어린 시절 광양 숲이 자신의 전용 놀이터처럼 여기며 자랐다. 나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리저리 고쳐 잡아 오르내리며 티끌 없이 해맑게 웃는 모습도 잠시, 어느덧 청년이 되면서 어디 다른 지역에 돈을 벌러고 갔다고 소문을 들었었다. 많이 아쉬웠었는데 십수 년 뒤 주름선이 굵은 장년이 되어서 다시 광양으로 돌아왔다. 그간 고생을 하였는지 어렸을 때랑 다르게 투박한 모습이었지만 맑은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는 도중 저 멀리 김 씨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오늘은 바람이 매섭게 불어 거리에 사람도 없다. ‘이 사람아 기침도 심한데 왜 나왔어라’고 말하고 싶지만 한편으로 반가운 마음도 든다. 평소처럼 내 앞에 선 그의 모습에 오늘은 뭔가 다름을 느낀다. 나를 지긋이 쳐다보며 슬픈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