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문학에 물들다’<8>...품격 있는 문화도시, 유네스코 문학도시 광양! 문학관 건립으로…
‘광양, 문학에 물들다’<8>...품격 있는 문화도시, 유네스코 문학도시 광양! 문학관 건립으로…
  • 김영신 기자
  • 승인 2017.11.24 14:33
  • 호수 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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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 어름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청년시인… ‘윤동주’
   
   
 

서울 종로구 청운동‘윤동주 문학관’…광양에는 왜 ‘윤동주’가 없는가

문학관 기획취재 마지막, 산야의 나무들이 잎들을 미련 없이 떨쳐 내고 나목이 되어가는 늦가을에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인왕산 자락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을 찾았다.

종로에서 효자동과 청운동을 지나 부암동 고개를 넘다 보면 왼편으로 하얀 외벽의 깔끔한 건물 한 채가 있다. 윤동주 문학관은 북악산이 바라다 보이는 인왕산 자락에 1974년에 지어진 오래된 가압장을 개조해 지난 2012년 7월 25일에 개관했다.

스물여덟에 타국의 감옥에서 요절한 청년‘윤동주’

일제강점기는 현실의 우리 청년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이 더 많아 희망이 절벽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고통과 번민의 주제가 다를 뿐 윤동주와 같은 많은 청년들이 고뇌하고 번민하고 방황하던 시대였다. 시인 윤동주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서 우리말로 시를 쓰며 분노를 삭이던, 그 시대를 살았던 감수성 많은 문학청년이었다.

윤동주 시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광양과의 인연도 깊다. 망덕포구 정병욱 가옥에서 유고시집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에서 민족시인 윤동주의 탄생은 없었을 것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이 함께하는 윤동주 문학관, 그의 문학관이 왜 그곳에 들어서게 됐는지를 안다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재학중이던 1941년,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1909~1988)의 집에서 문우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하며 하숙집과 가까운 인왕산에 올라 시정(詩情)을 다듬었다.‘별헤는 밤’,‘자화상’,‘또 다른 고향’등 우리가 좋아하는 그의 대표 시들이 하숙생활을 하던 그 시기에 씌어졌다.

그런 인연으로 종로구는 인왕산 자락에 방치돼있던 청운동 수도 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문학관을 만들었다. 윤동주 문학관은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물이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가압장의 의미를 살려 영혼의 물길에 영감을 주어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돌게 하는 곳이다.

‘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 어름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청년시인…

문학관에서 처음 마주하는 글귀다. 시인이 죽은 후 3년 지나 출간된 시인의 첫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序文)에서‘향수’의 시인 정지용은 윤동주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9개의 전시대가 놓인 제 1전시실에는 생가에서 나온 우물목판과 시인이 좋아했던 책들, 빛바랜 사진과 육필원고, 시 등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숙연한 마음으로 오롯이 시인을 느낄 수 있다.  오랜 사진 속, 낯익은 사진하나가 시선을 붙든다. 바로 윤동주의 육필원고 필사본을 잘 지켜 낸 정병욱 선생과 함께 한 사진이다.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가는 제2전시실, 수돗물 저장소였던 이곳은 녹 슨 뚜껑을 없애고 만들었다 해서‘열린 우물’이라고도 부른다. 해설사는“아름답다고도 말하는 관람객도 있지만 결코 아름답지 만은 않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 곳은 자유가 제한된 느낌, 갇힌 느낌이 드는 곳이다”며“일제 36년, 징용노동자, 위안부 등 수많은 우리 민족이 희생됐다. 1910년 일본에게 강제로 민족의 주권을 뺏긴 아픔을 표현하는 전시관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뚜껑이 있던 흔적은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늦가을 파란 하늘 빛과 바람이 시인의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되어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든다.

‘닫힌 우물’이라 부르는 제 3전시실은 윤동주가 수감되었던 후쿠오카 형무소를 형상화한 곳으로 이곳에서는 윤동주의 탄생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의문의 옥사를 할 때 까지 시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시인의 아까운 짧은 생을 마주할 수 있다.

정병욱 교수 없었다면 시인 윤동주도 없어…

36년 동안 긴 공직생활을 마치고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해설사의 길을 택했다는 윤성기 해설사는“윤동주 시인의 유작은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 경향신문 기자와 후배 정병욱이 갖고 있던 필사본 시집 등 31편의 시를 모아 1948년 1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여‘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에서 펴냈다”며“망덕포구 정병욱 가옥에서 유고시집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에서 민족시인 윤동주의 탄생은 없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윤 해설사는 광양시가 아직도 정병욱 가옥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있음을 아쉬워했다. 윤동주 시인의 조카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는 2012년 7월 25일 개관식에서“하늘나라에서 큰 아버지와 정병욱 교수님이 개관식에 오신 많은 분들을 보고 꽤 쑥쓰러워 하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심(詩心)은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지 요란한 모임으로 새기는 것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우리나라에서 윤동주를 기념하는 대표적 공간은 시인의 모교였던 연희전문대를 전신으로 하는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관과 종로의 윤동주 문학관 두 곳이다.

윤동주 문학관은 개관 5년여 만에 년간 1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대중적이면서 인간적인 문학관’으로 자리 잡았다. 문학관 주변으로‘시인의 언덕’이 아름답게 조성돼있고 연인과 등산객, 관광객들이 편안하게 찾는 서울의 볼거리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문학관이 있는 종로구는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 4학년 졸업반이었던 1941년에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딱 4개월가량을 살았을 뿐 인연이 그리 깊지는 않다. 윤동주와 함께 하숙을 했던 후배 정병욱은“단조롭지만 참으로 알찬 나날이었다”고 윤동주와의 추억을 회상했다고 한다.

윤동주 문학관을 다녀오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윤동주를‘선점’해 자산으로 삼은 종로구의 노력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