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있었던 쌍사자석등을 보려고 국립광주박물관을 찾아갔다. 석등은 박물관 중앙홀에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대웅전 앞뜰에서 불을 밝히고 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했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찬란한 불빛 속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국보 제 103호인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물 제 112호인 삼층석탑과 함께 광양시 옥룡면 중흥산성 안의 옛 절터에 있었다. 쌍사자석등은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댄 채 발돋움하고 서서 등을 받치고 있는 모양은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석조물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에 옥룡보통학교 후원회에서 학교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석등을 땅 주인과 상의도 없이 부산의 골동품상에게 팔기로 했다. 석등이 국보급 문화재라는 가치를 몰랐던 옥룡보통학교 후원회에서는 석등이 예상가보다 훨씬 많은 데다, 광양군청과 상의하던 중 이 일이 위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매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석등이 뛰어난 예술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 대구의 일본인 골동품 수집가는 부산의 골동품상과 모의하여 석등을 분해하여 옥룡면사무소 앞으로 옮기다 주민에게 발각되어 석등 반출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천년 동안 중흥산성에서 불심으로 백성의 안녕을 지켜왔던 석등이 일본인에 의해 끌려나오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중흥산성 아랫마을에 살았던 돌아가신 아버지는 석등이 팔려나가기 전날 밤에 석등이 울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국운의 흥망성쇠에 따라 석등의 불이 밝게 빛나거나 석등이 우는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왔다.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해에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에도 석등이 울었다고 한다.
외침과 민란이 많았던 내우외환의 역사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던 민초들은 그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석등에 불을 밝혔으리라. 더욱이 가파른 산에 산성을 쌓고 전란이 일어날 때마다 산성으로 피난 온 백성들은 석등에 불을 밝히고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빌었을 것이다.
그런데 호국 수호의 석등을 일본인들이 몰래 가져갔다는 소문이 떠돌자 민심은 들끓기 시작했다.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갖은 수탈과 핍박을 받고 살던 백성들은 왜놈들이 문화재까지 훔쳐가는 횡포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분개한 젊은이들이 봉기했지만 불꽃처럼 꺼지고 말았다. 동학혁명 때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항거하다 피 흘린 할아비처럼 그들도 쓰러지고 말았다.
지역민들의 저항이 심해지자 석등은 옥룡면사무소에 보관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총독부에서 전라남도 도지사 공관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경복궁 자경전으로 옮겼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현재 청와대인 경무대로 옮겨졌다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뒤 국립박물관이 있는 덕수궁으로 옮겼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972년 경복궁으로 이사를 가면서 옮겼다가, 다시 1986년 옛 중앙청 건물로 이사를 갈 때 석등도 옮겨졌다. 그러다 1978년 국립광주박물관이 신축 개관된 후에 국보급 문화재가 없는 이곳으로 1990년에 옮겨져 현재 1층 중앙홀에 전시되어 있다.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 103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 석등은 1930년 옥룡보통학교 후원회의 문화재에 대한 무지로 인해 일본인에 의해 몰래 반출되었다가 그동안 기구한 사연으로 일곱 번이나 옮겨다니다 60년 만에 고향 가까운 광주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쌍사자석등의 전설이 마치 일제침략으로 핍박받은 우리 조상들의 수난의 역사 같아서 애처롭다. 더욱이 석등이 신앙의 대상물이 아닌 문화재로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렇지만 국태민안을 바라는 고향민들은 석등이 밝게 빛나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