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문학에 물들다’<7>-품격 있는 문화도시, 유네스코 문학도시 광양! 문학관 건립으로
‘광양, 문학에 물들다’<7>-품격 있는 문화도시, 유네스코 문학도시 광양! 문학관 건립으로
  • 김영신 기자
  • 승인 2017.11.09 18:31
  • 호수 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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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추사관과 유배지에서 동시에…

제주 추사관은 조선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예술 세계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10년 5월에 건립됐다. 1984년 제주지역 예술인들과 제주사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마련한‘추사유물전시관’이 현재 기념관의 전신이 됐고 유물전시관이 낡게 되자 2007년 10월 국가지정문화재 승격과 함께 지하 2층, 지상 1층, 연면적 1193㎡ 규모로 리모델링해 새롭게 개관했다.

문학관이라기보다는 전시관이라고 해야 가까운 제주 추사관은‘추사체’라는 서체가 먼저 생각나는 추사 김정희의 그림 국보 제 180호‘세한도’와 추사 현판 글씨, 예산 김정희 종가 유물, 영조대왕 친필 영인본 등 130여점의 귀중한 자료들을 관람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년)에 태어나 1856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예사 뿐만 아니라 금석고증학, 경학, 불교,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19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석학이라고 평가받는다.‘북학의’를 쓴 북학파의 대가 박제가가 김정희의 스승이다.

김정희 선생은 순조 임금이 보위하던 1840년 9월, 55세의 나이에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일명‘정치범’으로 제주에 유배되어 9년여의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서예사에서 빛나는 추사체’라는 가장 큰 업적을 남기고 지방 유생들에게 서예와 글을 가르치며 제주 지역 학문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문학관 취재에 추사관을 포함한 이유는 광양에서도 많은 유배인들이 머물며 일기 등 기록을 통해 흔적을 남겨 놓았고 그들이 남긴 기록은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문학이자 소중한 역사문화자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영조대왕의 친필 영인본의 설명을 마친 고정대 해설사는 추사 김정희와 영조대왕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추사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했으나 증조할아버지가 세상을 빨리 떠나자 화순옹주도 식음을 전폐하고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신하들이 화순옹주의 열녀비를 세우자고 영조대왕에게 건의했지만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버렸으니 열녀가 아니라 불녀라며 크게 노했다. 훗날 정조가 뒤늦게 고모 화순옹주의 열녀문을 김정희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 세웠다. 화순옹주의 열녀문은 조선 최초의 열녀문이다”고 숨은 역사의 한 토막을 전했다.

해남 대흥사의 현판‘무량수각’도 김정희의 글씨임을 모르는 이는 드물다. 추사 김정희가 조정의‘삼천리 밖 위리안치(圍籬安置, 처소 둘레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두는 형벌)’의 유배형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남쪽 땅 끝 마을까지 내려와서 제주도로 향하는 배에 오르려 했으나 파도가 거칠어서 출항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동갑내기 친구인 초의선사가 주지스님으로 있는 대흥사에 잠시 머무르면서 김정희 보다 앞선 세대였던 이광사 선생이 완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써 준 대웅전의 현판‘대웅보전’을 내리게 하고 자신이 쓴‘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했다.

그러나 훗날 대흥사를 찾았을 때 자신이 내리게 한 대웅전의 현판을 다시 걸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추사 김정희가 쓴‘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은 현재 대웅전의 서쪽 백설당에 걸려 있다고 해설사는 설명했다.

24살에 아버지를 따라 중국 유학을 다녀 온 김정희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두고 신선한 학풍과 예술사조를 이끌었으며 그는 우리나라의 옛 비문을 조사하고 연구해 독자적인 학문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가 이룬 많은 고증의 업적 중 가장 크게 빛나는 것은 무학대사비로 잘 못 알려진 북한산의 비문을 조사하여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해 낸 것이다.

다음 글은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인 대정현에 도착해 아우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대정으로 가는 길의 절반은 순전히 돌길이어서 사람과 말이 발을 붙이기 어려웠고, 절반을 지난 뒤부터는 길이 약간 평탄하였네. 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 숲도 있었네. 이것은 육지의 단풍잎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에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아취가 있겠는가.”

 

춥고 배고프고 외로웠던 유배시절, 추사 김정희는 좌절하지 않고 끝없는 열정으로 학문을 탐구한 추사체를 완성했고 유배 시절 어려움을 무릅쓰고 중국의 신간서적이나 학문적인 자료들을 아낌없이 구해 준 제자 이상적에게‘세한도’를 그려 선물로 주었다.

추사기념관 바로 뒤편에는 유배 시절 선생의 거주지가 당시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다. 제주 전통 생활양식에 따라 안거리, 밖거리로 나누어진 민가로, 검은 화산석 돌담이 인상적이다.

추사기념관을 관람하는 또 다른 묘미는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승효상 씨의 작품세계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둥벼락과 폭풍을 무릅쓰고 뱃사공마저 두려워하는 제주 유배길에서 뱃머리에 꼿꼿하게 앉아 시를 읊었다는 추사 김정희의 흔들림 없는 선비정신을 제주 서귀포 대정읍에 있는‘추사관’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24세 때 쓴 현판(좌)과 55세 이후 제주 유배생활 중에 쓴 현판(우)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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