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은 여수, 순천에 비해 훌륭한 인물이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잘 모르지요.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고 우리 지역 역사, 우리 지역 인물에 대한 관심이 더욱더 많이 필요합니다.”
의송(毅松) 박태상 전 조선대학교 교수(명예정치학 박사)의 공적비가 봉강면 신룡리 형제의병장 쌍의사에 세워진다.
광양시는 지난 1일 문화유산 보호관리 위원회 심의를 열고 형제의병장 숭모회가 설립할‘형제의병장 현창사업 유공 의송 박태상 선생 공적비’설립을 승인했다.
봉강면 신룡리 형제의병장 쌍의사에 세워지는 공적비 높이는 2.5m다. 공적비에는 박태상 선생이 조선대 사학과 교수 재임시 강희보ㆍ희열 형제 장군의 사료 수집은 물론, 위국충절과 정신현창을 위해 평생 노력해준 것에 대한 감사 내용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박태상 전 교수는 “고향 사람으로서, 학자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공적비까지 세워줄 계획이어서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68년부터 형제의병장 사료 수집
박태상 선생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68년부터 97년까지 형제의병장 사료를 수집했다. 70년 강씨 문중과 광양의 유지들이 강희보ㆍ희열 형제장군 숭모회를 창립해 봉강면 신룡리에 묘소와 묘비를 보수했고 사당을 건립했다.
74년 묘비를 건립하는 등 묘역정비 사업을 펼쳤고 94년에는 임란 형제 의병장 강희보ㆍ희열 장군묘 입비 후 위령제일불참 서회’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98년부터 동재, 서재 삼눈 등을 신축하고 사당과 관리사를 옮겨지었다. 2009년에는 형제의병장 영정을 제작했다.
강희보ㆍ희열 형제 의병장은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우고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나라에서는 이들의 공을 기려 강희보 장군에게는 호조좌랑, 강희열 장군에게는 병조참의의 벼슬을 추증했다. 선생은“임진왜란 당시 관군도 도망가는 상황에서 형제가 이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예가 드물다”며“우리 지역에 이렇게 훌륭하신 인물이 계신 것에 대해 후손들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국·충절 인물 다수 배출
박태상 선생은 광양이 예로부터 인물은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고려시대 학문과 시문에 뛰어났던 선비 김책(金策)은 광종의 정치개혁에 중추적 역할을 했으며 광종이 군신에게 베푼 연회장에서 친히 공복을 하사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김황원(金黃元)은 시문에 능해 해동제일가로 칭송 받았으며, 한림학사를 지냈다. 시문에 능한 대학자이며 조선왕조 건립에 큰 공을 세운 이무방(李茂方), 검소하고 청렴한 선비로 우왕과 왕세자의 스승을 지낸 김약온(金若溫)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호남 성리학의 사종(師宗-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이며 호남 삼걸의 한분인 최산두(崔山斗), 한일합방의 치욕에 자결로 맞선 우국지사이며, 한말 4대 문장가의 한 분인 매천 황현(黃泫),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격전을 벌이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옥사한 황병학 의병장 등이 있다.
해방이후에도 국회 사법분과위원장을 지낸 엄상섭(嚴詳燮),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그리고 민주당 총재를 지낸 조재천(曺在千), 보사부 장관을 지낸 이경호(李坰鎬), 체신부 장관과 농림부 장관을 지낸 김보현(金甫炫), 전남도지사와 건설부 장관을 지낸 김종호(金宗鎬)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다.
박태상 선생은“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의병활동이 활발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충절의 고장이 바로 이곳 광양”이라며“하지만 이런 역사적인 인물들을 요즘 사람들이 잘 모르고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인문학·한자교육 절실
박 선생은 요즘 물질 만능 세태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한 마디 했다.“정신과 경제는 수레바퀴처럼 맞물려 굴러야 하는데 요즘에는 경제, 돈벌이에만 치우친 나머지 정신 수양에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롯데그룹 사태를 살펴봐도 형제끼리 재산으로 싸우고, 가족들끼리 부모 재산을 서로 차지하려고 얼마나 많은 소송이 일어나느냐”며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선생은 이런 현상의 원인을‘인문학 홀대’라고 진단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문학을 가르치고 정신을 수양하는 공부가 필요하다”며“인성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역설했다. 선생은 갈수록 한자를 소홀히 하는 것도 아쉽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대부분 한자어인데 한자를 잘 모르니 당연히 어휘력도 부족해진다는 지적이다. 그는“요즘 젊은 사람들은 부모님 이름은 물론, 자기 이름조차 한자로 못 쓰는 사람들이 많다”며“한자 교육이 좀 더 강화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박 선생은“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책을 손에 놓지 않고 지역 인물 연구에도 더 노력하고 싶다”며“시민들이 우리 지역 문화와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박태상 선생은 광양읍 죽림리 대실마을이 고향으로 올해 89세이다. 조선대 사학과 교수-조선대 상임이사-광양시지편찬위원회 대표위원-매천 황현 순국 100년 기념사업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책으로는 그동안 한시 1300여편을 지었는데 한시를 엮은‘의송 한시집’ 1~6권이 있으며 고희기념 논문집, 팔순기념 논문집이 있다. 이밖에 선생의 한시와 생애를 엮은‘기러기 만리를 날다’(박은경 지음)가 있다. 박병호 행정자치부 창조정부조직실 조직정책관이 선생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