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53> 광양 용지큰줄다리기를 아시나요?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53> 광양 용지큰줄다리기를 아시나요?
  • 광양뉴스
  • 승인 2015.07.24 21:47
  • 호수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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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동 용지큰줄다리기 보존회장 김영웅

겨울철 김만 있으면 밥 한 공기 뚝딱, 맛좋은 반찬이 되어 주던 김. 그 김이 맨 처음 광양에서 시작된 것을 아시는지?
영암군 사람 김여익이 병자호란의 삼전도 치욕을 듣고 호(胡)놈의 연호를 쓰며 고향에 살 수 없다고 하여 정착한 땅 광양 태인동(당시 이름 인호도).

김여익 공이 1642년 겨울, 섬진강 하구의 배알도 해안에 표착한 밤나무 가지에 이름 모를 해조가 부착한 것을 발견하고 채취해 시식해 보았더니 양분이 많고 맛이 좋더란다. 이듬해인 1643년 현재 연관단지 부지로 편입되어 사라진 애기섬 주변에 밤나무섶과 죽림(竹林)을 이용한 건홍양식에 성공한 것이 우리나라 김 양식의 시초이다.

김 풍작 기원하며 300여 년 전부터 매년 정월대보름날 열려

용지큰줄다리기는 1643년경 김여익 공의 세계 최초 김양식법 개발 전파로 김의 원산지가 된 태인동 용지마을에서 주민의 안녕과 김(海衣)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정월대보름날 저녁에 성행하였던 민속놀이이다. 1700년대 초기에 시작되어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까지 25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풍습이다.

명색이 광양토박이인 필자도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는 그런 풍습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어 부끄러웠다. 허나 부끄러움도 잠시, 인터뷰를 하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스스로 위안이 되기도 했다.

용지큰줄다리기는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타 지역 줄다리기가 풍년과 건강을 기원하는 데 비해 용지큰줄다리기는 김 풍작을 기원하는 것이 그 첫째 특징이다. 또 다른 지역 줄다리기가 남녀 혼성으로 참가하여 힘을 겨루는 데 비해 용지큰줄다리기는 줄꾼에 여자가 끼어들면 줄이 터지는(끊어지는) 부정을 탄다하여 줄다리기 전 과정에서 여자들의 참가를 사실상 배제하고, 여자는 음식물 시중을 들게 하거나 응원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한 점이 다르다.

줄다리기 노래 역시 다른 지역과는 차이가 있다. 강진, 장흥 등지에서는 후렴구 없이 노래만 메기고 받는 형식으로 이어져 오는 데 비해 후렴구 사용이 발달되어 있다.‘우이여 헤-에’인 후렴구는 매우 우렁차 남성적 기상이 넘쳐난다.

여섯 마지기 볏짚이 줄을 만드는 데 사용되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마을과 마을이 또는 읍, 면 단위로 행해지는 데 반해 용지큰줄다리기는‘용지’라는 마을에서 안몰과 선창몰로 나뉘어 250여년이나 이어져 왔다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용지마을을 중심으로 이어져 오던 풍습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만 끊어지고 만다.

 “1993년 동광양시에서는 우리 고장 문화유산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광양시 의회 김창기 부회장이 아버지(고 김도현)와 8촌간인데 우리 마을에서 전해오던 용지큰줄다리기를 복원해보자고 뜻을 모았어요. 아버지가 고증작업을 맡아서 전체상황을 구술하고, 당시 동광양시 문화부계장으로 근무하던 민점기 씨가 받아 적어서 복원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겁니다.”

1994년부터 용지큰줄다리 보존회장을 맡아서 21년째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김영웅 회장의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초대 줄다리기보존회장을 맡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고 이후 그가 맡아온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용지 마을 주민 모두의 마음 속 깊이 면면이 이어져 오던 용지마을 큰줄다리기를 1950년대 초까지 줄다리기에 직접 참여하였던 기능보유자들이 생존해 계실 때 발굴 복원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줄다리기 하는 장면을 본 기억은 없지만, 노래만큼은 어릴 때부터 입에서 입으로 후렴구를 부르고 다녀 그 멜로디가 귀에 익숙하였습니다.”

용지큰줄다리기는 정월 초닷새 집집에서 볏짚을 거두어 마을 공터 팽나무에다 줄을 걸고, 볏짚을 세 가닥으로 꼬아가는 일부터 시작된다. 김 생산이 한창인 때지만 전 마을 주민이 한마음으로 매달리는 공들인 작업 끝에 열나흘이 되면 길이 40~50미터, 둘레 1.5미터 되는 큰 줄을 완성하고 큰 줄 양쪽에 2~3미터 되는 곁줄을 달아내 줄꾼들이 끌어당길 수 있도록 한다. 이 줄 만드는 작업을‘줄드리기’라고 한다.

비 비 라 도 시 라/뱅뱅뱅뱅 도시라/어샤어샤어허어샤
쇠줄보담도 찔기게/어서바삐 디리자/어샤어샤어허어샤
어서바삐 디리갖고/이 줄을 매고서/어샤어샤어허어샤
정월이라 대보름날/줄끗으로 나가세/어샤어샤어허어샤(후략)

줄드리는 과정에서 부르던 노래이다. 소리꾼이 앞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사람들이 후렴을 합창하는 형식으로 부르게 된다.

골목을 경계로 안쪽은 안마을, 바깥쪽은 선창마을로 구분하여 안마을은 암줄, 선창마을을 숫줄을 사용하여 편을 나누었다. 과거에는 여자의 참여를 배제하였으나 복원한 용지큰줄다리기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여 여자의 참여도 허용하였다.

줄다리기는 적게는 백 오십여 명에서 많게는 오백 명 가량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먼저 흰색 바지 저고리를 입고, 흰색 수건, 흰 고무신을 신고 줄을 메는 남자 줄메기꾼이 백여 명 이상 필요하고, 고위에 올라 줄의 진퇴를 지휘하는 지휘자 역할을 하는 줄잡이꾼도 두 명의 남자가 담당한다. 이때 줄잡이꾼의 복장은 쾌자 두루마기를 입고 이마에는 흰 띠, 손에는 술이 달릴 깃발을 들어 대장임을 알렸다.

줄 앞에서 줄을 인도하며 줄소리 앞부분을 선창하는 두 명의 남자 앞소리꾼은 쾌자 두루마기에 패랭이 모자, 이마에 흰 띠, 허리에는 청홍베띠를 둘렀다.

또  김풍작 기원제를 모시는 제관도세 명 필요하다. 이외에도 대회기와 마을기, 그리고 응원깃발을 든 기잡이가 40여명, 길놀이와 뒤풀이를 주도하여 줄다리기 전 과정의 응원과 소리반주를 맡은 농악대가 30여명 있어야 한다.

정월대보름날 저녁이 되면 농악대가 줄 앞에서 흥겨운 한마당을 펼치는 길놀이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길놀이 후에는 탕건과 흰 두루마기 차림의 제관 3명이 제상을 들고 나와 암줄과 숫줄 사이 중앙에 내려놓고 용왕님께 김풍작을 기원하는 제를 모신다.

안몰소리꾼이 “어이, 동네 사람들 줄 메소.”하는 신호에 맞추어 줄꾼들이 “우이여 헤-에”하며 메고 있는 줄을 머리 위로 올렸다 내리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한발 한 발 줄다리기 대형으로 맞추어 나가며 다음의 노래를 부르는데 이를 <진잡이>라고 한다.

선창몰 사람들아/ 줄 한 번 걸어도라/ 우이여 헤-에
안몰 사람들아/ 줄 한 번 걸어도라/ 우이혀 헤-에
쇠줄보다 찔긴줄로/ 문전까지 끌어주마/ 우이여 헤-에
항우까지 힘을 모아/ 납작하게 깔아주마/ 우이혀 헤-에
가지마라 가지마라/ 줄안끗고 어디가냐/ 우이여 헤-에(후략)

암줄과 숫줄이 고를 걸기 위해 자기편 쪽으로 다가오라고 하거니, 못 간다거니 하며 버티며 익살과 재담으로 혼례의식을 풍자하는 노래가 이어진다.

어허 숫줄 뭐하는가/ 빨리와서 걸어보세/ 우이여 헤-에
못가겄네 못가겄네/ 사내체면 꼴이아닐세/ 우이여 헤-에
암줄이 갈것인가/ 신부주착 못떨겄네/ 우이여 헤-에
그럼좋네 버텨보세/ 밤새도록 안되겄네/ 우이여 헤-에
안되겄네 안되겄네/ 용왕님이 노하겄네/ 우이여 헤-에
한발한발 양보하여/ 중간에서 만나보세/ 우이여 헤-에(후략)
 
와~~와~~ 함성을 지르며 암줄과 숫줄이 드디어 부딪히는데 줄잡이는 줄 앞에서 깃발을 휘둘러 줄의 진퇴를 지휘하고, 농악대는 휘몰이장단, 깃발은 하늘로 솟구치며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양편줄이 뒤로 쫘악 물러섰다 다시 맞부딪히는 동작을 3회 반복한 후 고를 거는 <고걸이>를 한다.

고걸이 이후 징소리가 울리는 소리에 맞춰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줄다리기는 20미터 이상을 끌어와야 승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보통 2~3시간이 걸렸으며 동이 트도록 결판이 나지 않아 톱으로 줄을 끊고 무승부를 선언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장시간 승부가 나지 않을 때는 양편대표의 합의로 현 위치에서 새참을 먹고 다시 줄다리기를 하였다고 하니 그 위용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노사화합의 장 지역민과 어울림 공간으로 이어지길

김영웅 용지큰줄다리기 보존회장은 용지마을에서 태어나 예순이 넘은 지금도 용지마을에서 살고 있다. 항운노조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지금도 태인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아버지가 고증하고 시청의 후원을 받아 복원한 용지큰줄다리기는 1993년 제21회 남도문화제에 참여하여 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광양시민의 날 행사나 전어축제, 정월대보름 등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하였다. 한때는 진상고등학교(현 항만물류고등학교)에서 전통계승 차원에서 협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줄다리기 자체가 워낙 인원이 많이 필요한 행사이다 보니 자력으로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용지 마을 사람들 중 나이 드신 분들은 돌아가시고 젊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광양시에서는 전국대회에 나가보라고 권유하는데 몇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간을 빼서 전국대회에 나가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정월대보름 공연을 할 때는 금호동 주민이나 포스코 직원들이 도와주기에 그 나마 행사도 할 수 있는 형편입니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음을 그는 안타까워한다. 계승은 해야 하는데 공연을 할 수 있는 공연장조차 없다. 큰 줄이나 농악대 도구 보관,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인 용지마을회관이 있으나 그곳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천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다는 것도 문제로 꼽았다.

“예전에는 김 풍작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지만 세상이 급변하고 있으니 그 의미도 달라져야 합니다. 노사화합의 장, 지역민과의 어울림 마당, 그리고 전통을 유지하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합니다.”

보수도 명예도 없이 봉사직으로만 하다 보니 장기집권이 되었다며 언제라도 훌륭한 후배가 나타나면 자리를 물려주고 싶다는 김영웅 회장. 우리 세대가 지나면 누가 이어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양선례 광양문화연구회